관노부 ()

목차
관련 정보
고대사
제도
고구려의 단위 정치체.
이칭
이칭
관나부(貫那部)
내용 요약

관노부는 고구려의 단위 정치체로 5부 중의 하나이다. 연맹 단계를 거쳐 소국 수장이 중앙 귀족화하면서 지배자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부(部)가 편제되었다. 고구려 5부와 관노부에 대해서는 『삼국지』와 『후한서』, 『삼국사기』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관나부(貫那部)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초기에 주변 소국을 정벌하고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확한 영역을 알 수는 없으나 압록강 이남과 집안시 외곽으로 추정된다. 3세기 이후 왕권이 강화되면서 세력이 미약해졌다.

목차
정의
고구려의 단위 정치체.
개설

관노부는 고구려 5부 중의 하나로 관나부(貫那部)라고도 한다. 고구려 초기에는 자체적으로 주변 소국을 정벌하고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왕권의 신장과 함께 집권 체제가 강화되자 점차 약화 소멸되었다.

내용

한국고대사에서 부(部)는 연맹 단계를 거쳐 소국 수장이 중앙 귀족화하면서 편제된 지배자 공동체의 성격을 지닌다. 고구려의 5부 역시 이른 시기부터 핵심 정치체제로 기능하였다. 고구려 5부에 대해 주1주2에는 왕의 부인 계루부(柱婁部)와 함께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관노부, 순노부(順奴部)가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는 이들의 이름을 각각 계루부,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환나부(桓那部)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후한서』에 보이는 5부의 명칭에 대해서 당의 장회태자 이현이 주를 달아 계루부를 내부 또는 황부로, 절노부를 북부 또는 흑부 · 후부로, 순노부를 동부 또는 청부 · 상부 · 좌부로, 관노부를 북부 또는 적부 · 전부로, 소노부를 서부 또는 백부 · 하부 · 우부 등의 방위명 등으로 대응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7세기 당시 고구려의 수도 구획명으로 기능하였던 방위부와 고구려 전기의 고유명 부[나부]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관노부는 『삼국사기』에 관나부로 나오는데, 가장 이른 기록은 태조왕이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해 그 왕을 포로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나부의 우태 미유차대왕의 왕위 계승을 도우고 그 공으로 패자 관등에 올라 좌보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에서 관노부의 정치적 역할이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3세기 이후 고구려 왕권이 강화되고 고유명 5부가 쇠퇴하자 관노부 또한 그 세력이 갈수록 미약해져 갔다. 『삼국지』에는 동천왕의 생모가 관노부 출신으로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이 주통촌녀(酒桶村女)와 사통하여 동천왕을 낳았다고 한다. 관노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중천왕이 소실인 관나 부인을 바다에 던져 죽였다는 것이다. 3세기 이후 관노부가 매우 쇠약해지고 점차 소멸되어 갔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관노부의 정확한 영역은 알 수가 없다. 압록강 이남 오늘날 북한 자강도 서부 일원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정확한 근거가 없다. 다만, 사료에는 관노부 출신인 동천왕 생모의 고향이 제사용 돼지가 도망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 기록을 따른다면 관노부는 당시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외곽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초기정치사연구』(여호규, 신서원, 2014)
『고구려의 영역지배 방식 연구』(김현숙, 모시는 사람들, 2005)
『고구려정치사연구』(임기환, 한나래, 2004)
『고구려사연구』(노태돈, 사계절, 1999)
『조선전사(고구려편)』3(개정판)(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고구려 5나부의 성립과정과 영역 검토」(조영광, 『대구사학』 98, 2010)
「고구려 초기의 지방통치제도」(이종욱, 『역사학보』 94·95, 1982)
「高句麗の五族について」(三品彰英, 『朝鮮學報』 6, 1950)
주석
주1

중국 진(晉)나라 때에, 진수가 지은 위ㆍ오ㆍ촉 삼국의 정사. 중국 이십오사의 하나로, 위지(魏志)에 기록된 부여전(夫餘傳), 고구려전(高句麗傳), 옥저(沃沮), 읍루(挹婁), 예(濊), 삼한전(三韓傳)은 우리나라의 상대사(上代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기전체로, 위지 30권, 촉지 15권, 오지 20권으로 모두 65권으로 되어 있다. 우리말샘

주2

중국 남북조 시대에, 송나라의 범엽(范曄)이 펴낸 후한의 정사(正史).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의 하나로, 기전체를 썼고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양나라의 유소(劉昭)가 보충하였고, 지(志)는 진나라의 사마표(司馬彪)가 지었다. 120권. 우리말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