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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재(金光載)

고려시대사인물

 고려후기 첨의평리, 삼사우사, 전리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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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려후기 첨의평리, 삼사우사, 전리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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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松堂). 중찬(中贊) 김태현(金台鉉)의 아들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해 성균학관이 되었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로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했고,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1339년(충혜왕 복위 1) 조적(曺頔)이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호종하였다. 고려에 돌아와서 군부총랑(軍簿摠郎)이 되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다. 이 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군준(李君俊)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4년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대신들이 아부하지 않는다고 모함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전임되었다. 그러나 곧 밀직부사·제조전선(提調銓選)을 지내고, 지사사(知司事)에 승진하였다. 1349년 충정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그 사부(師傅)가 될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인사권을 맡았으나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정사 간섭이 심해 물러났다. 그 뒤 덕녕공주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50년(충정왕 2)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는데, 이 때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과 무선(武選)을 총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건의해 이를 시정하도록 했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후 12년간이나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했고, 어머니가 죽자 여막에서 상을 마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김광재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정표(旌表)하고, 그 마을의 호(戶) 일부에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 그에게 이를 봉사하게 하였다. 김광재는 효제(孝悌)에 힘써 생산에 관심이 없었고, 항상 거문고와 글을 가까이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손홍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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