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는 김익(金翊)이다.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고,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이다. 김익과 김붕섭은 재행은 있었으나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큰형은 김덕홍(金德弘)이고, 둘째 형은 김덕령(金德齡)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큰형 김덕홍이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경명과 함께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부사(長城府使) 이귀(李貴)는 방백(方伯)에게 김덕령을 장군으로 천거하였다. 특히 이경린은 전투 장비까지 내주면 거병할 것을 권유하였다. 김덕보는 큰형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노모를 모시고 집에 머물러 있었다.
둘째 형 김덕령은 순절한 형 김덕홍의 뒤를 이어 창의(倡義)하였다. 그의 의병 활동은 형에 대한 복수의 성격이 강하였다. 거병 직후 둘째 형 김덕령은 도원수(都元帥) 권율로부터 초승장(超乘將)이란 칭호를 받았다. 분조(分朝)를 이끌던 광해군은 김덕령에게 익호장(翼虎將)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의병장으로서 기치를 세웠던 작은 형 김덕령은 두 차례에 걸쳐 옥사에 연루되었다. 그는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무고를 당해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김덕보는 두 형이 비명(非命)에 죽은 것을 애통히 여겨 세상 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광주 무등산에 풍암정(楓巖亭)을 짓고 은둔하여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27년(인조 5) 후금(後金)이 조선을 침입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安邦俊)과 합심하여 창의하고자 하였으나, 노병으로 전장에 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김덕보는 장형 김덕홍, 차형 김덕령, 박광옥(朴光玉), 오두인(吳斗寅)과 함께 의열사에 배향되었다. 1785년(정조 9) 정조는 김덕보를 집의에 증직하였다. 차형 김덕령에게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장형 김덕홍은 지평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