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즉조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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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즉조당
덕수궁 즉조당
건축
유적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에 있는 조선후기 에 중건된 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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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에 있는 조선후기 에 중건된 전각.
내용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던 건물로서, 1623년(인조 즉위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이라 불렀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옮겨온 뒤 정전(正殿)으로 사용되었고, 한때 태극전(太極殿)·중화전(中和殿) 등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이 건립된 뒤부터는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것을 같은해 3월에 중건한 것이다. 고종이 상왕이 된 뒤 거처하던 궁궐로서 궁명(宮名)을 덕수궁으로 바꾼 뒤인 1907년부터 1911년까지는 후비인 엄비(嚴妃)가 이곳에 거처하였다.

건물의 위치는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 중앙 북쪽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화전의 바로 뒤에 높은 돌기단을 쌓고 세웠다. 준명당(浚眀堂)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한편, 현관 앞 처마 밑에는 ‘즉조당(卽阼堂)’, 대청 앞 기둥 위쪽에는 ‘경운궁(慶運宮)’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놓았다.

건물의 구조는 먼저 기단부터 보면 긴 댓돌을 바른켜쌓기로 쌓은 높은 기단으로, 윗면에는 네모 전돌을 깔았으며 대청에 맞추어 기단 앞쪽에 3줄의 계단을 배열하였다. 주춧돌은 네모뿔대모양으로 이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귀기둥을 기준으로 건물의 구조를 보면, 기둥 윗몸을 창방에 연결하여 짜맞춘 다음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이 위에 당초무늬를 새긴 부재를 놓아서 가로로 댄 둥근 모양 주심도리(柱心道里)와 직각 방향으로 걸친 둥근 모양 보를 아울러 받치고 있다. 쇠서[牛舌] 없이 초각(草刻)된 부재만을 써서 초익공식을 택하였고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소로를 놓아서 장여를 받치고 있다.

공포대(栱包帶)에 칠해진 단청은 녹색과 적색을 썼으며, 청색과 밝은 황색의 대비적 사용으로 밝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 위의 처마는 겹처마이며, 팔작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착고·부고·적새 등을 켜로 쌓아 단정하게 구성하였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은 복도와 난간으로 연결된 준명당과 함께 계획된 것이며, 후원에 남아 있는 굴뚝은 주변의 풍치를 더하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고궁건축』(장경호 외, 열화당, 1988)
『서울특별시사』고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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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주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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