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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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며 숙위기관(宿衛機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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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도방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며 숙위기관(宿衛機關)이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경대승이 처음 설치하였다. 경대승의 신변을 보호하는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차 숙위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경대승이 사망하고 해체되었다가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교대로 숙위하는 것 외에 외적의 방어, 토목공사, 비상시의 경비 등 업무도 수행하였다. 삼별초가 조직된 이후 도방은 숙위만을 맡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숙위기관으로 정치적, 군사적 무력수단으로 활용되다가 무신정권이 몰락하며 폐지되었다.

목차
정의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며 숙위기관(宿衛機關).
개설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경대승이 1179년(명종 9)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살해하자, 일부 무신들은 적의를 품게 되었다. 이에 경대승은 신변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되어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결사대 100여 명을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그 이름을 도방이라 하였다.

내용 및 변천

도방은 일종의 사병집단제로서 원래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뒤에는 숙위대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도방의 구성원들은 침식과 행동을 공동으로 하면서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처음에는 단순히 경대승의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등장했으나, 뒤에는 비밀탐지, 반대세력의 숙청을 비롯해 주가(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약탈 · 살상 등을 자행하여 그 폐단이 컸다.

1183년 경대승이 병사하자, 도방은 일시 해체되고 그 무리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대부분은 고문에 못 견뎌 중도에서 거의 죽고 생존자는 4, 5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뒤, 최충헌(崔忠獻)이 집권하자 다시 설치되어 그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최충헌은 불의의 변이 생길까 두려워 문무관 · 한량 · 군졸을 막론하고 힘이 센 자가 있으면 이를 불러들여 6번(番)으로 나누어 날마다 교대로 자기 집을 숙직하게 하고 그 이름을 도방이라 하였다. 그가 출입할 때는 6번이 모두 함께 호위하게 해 그 위세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이때의 6번도방은 다음 최우(崔瑀) 때 이르러 한층 더 강화되었다. 최우는 집권하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집권 후에는 그의 사병과 6번도방을 병합 · 개편해 내외도방으로 확장, 강화하였다. 이 내외도방의 편성은 최우의 사병으로 내도방을 조직하고, 최충헌의 도방을 계승해 외도방을 조직한 것 같다. 그리하여 내도방은 최우와 그 사저(私邸)의 호위를 맡게 하고, 외도방은 그 친척과 외부의 호위를 맡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내외도방은 각각 6번으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우 때의 도방은 분번해 교대로 숙위하는 것 외에 반도의 토벌 및 외적의 방어, 토목공사에의 취역, 비상시의 비상경비 등에도 종사하였다. 이렇게 도방은 최씨정권의 숙위기관으로 중요한 일을 맡았기 때문에 그 훈련과 장비도 굉장하였다. 1229년(고종 16)최우가 가병(家兵)을 사열할 때 도방의 안마(鞍馬) · 의복 · 궁검 · 병갑 등이 아름답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고 『고려사절요』는 전하고 있다.

그 임무도 사적인 것 외에 외적의 방어, 토목공사, 비상시의 경비 등 공적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조직되자, 공적 임무는 삼별초가 맡게 되고, 도방은 오직 사적 임무인 숙위만을 맡게 되었다. 명칭에 있어서도 공적인 군사활동을 할 때는 가병 또는 사병이라 불렸다. 그러나 사적인 위병일 때는 원래의 사칭(私稱)인 도방이라 불렸으나, 이것도 삼별초가 조직된 뒤 가병이니 사병이니 하는 말은 없어지고 오직 도방으로만 불리게 되었다.

최항(崔沆) 때 이르러서는 분번제(分番制)가 더욱 확대되어 36번이 되었다. 그 병력은 전대(前代)의 것을 계승하고, 거기에 다시 그가 집권 전부터 거느려 오던 사병을 합해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36번도방의 편성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1257년 최항이 죽자 최양백(崔良伯)이 이를 비밀에 붙이고 선인열(宣仁烈)과 더불어 최항의 유언대로 최의(崔竩)를 받들기로 하여, 문객 대장군 최영(崔瑛)채정(蔡楨), 그리고 유능(柳能)에게 연락해 야별초 · 신의군 및 서방3번 · 도방36번을 회합시켜 주야로 경비하게 하고 나서 상(喪)을 발표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체로 최항의 집권시대에 편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36번도방은 최의에 의해 계승되었다. 1258년(고종 45) 최의가 대사성 유경(柳璥), 별장 김인준(金仁俊, 金俊), 도령낭장 임연(林衍) 등에게 피살되어 최씨정권이 몰락되자 한때 왕권에 예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김준과 임연, 다시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에 의해 계승되었다. 또한 도방도 이들을 위한 사적 호위기관으로 그 구실을 다하였다.

1269년(원종 10) 임연은 삼별초와 6번도방을 거느리고 안경공 창(安慶公淐)의 집에 가서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그를 받들어 왕에 즉위하게 한 일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임연이 도방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도방도 최씨정권 후기와 마찬가지로 호위의 역할 외에 정치적, 군사적 무력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종이 홍문계(洪文系)를 시켜 송송례(宋松禮)와 삼별초를 움직여 임유무와 그 일당을 제거함으로써 무신정권은 100여 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의 세력기반의 하나였던 도방도 아울러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高麗 崔氏執權期의 都房」, 『韓國學硏究』 7(전경석, 숙명여대 한국학연구센터)
「崔氏武人政權下의 都房의 설치와 그 向方」(柳昌圭, 『東亞硏究』 6, 서강대 동아연구소)
「고려무인정치기구고(高麗武人政治機構考)」(김상기, 『동방문화교류사논고(東方文化交流史論攷)』,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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