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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근대사단체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한국망명인사들의 자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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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상해대한인거류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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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
    상해거류민단, 대한인민단, 교민친목회
    분야
    근대사
    유형
    단체
    성격
    독립운동단체, 자치기관
    설립시기
    1919년 3월
    해체시기
    1920년 10월 7일
    설립자
    상해거주교민
    시대
    근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한국망명인사들의 자치기관.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일명 상해거류민단·대한인민단이라고도 한다. 처음 교민친목회라는 명칭으로 상해에 거류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과 그 가족·친지는 물론, 국내로부터 망명해 온 동포들로 구성되어, 동포간의 친목과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조직 동기는 1919년 3월 3일 상해에 거주하는 교민들이 징안쓰로(靜安寺路)에 있는 중국학생회관에 모여 고종의 봉도식(奉悼式)을 거행하는 중에,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이 일제의 독살설로 알려지면서 비롯되었다.
    이어 2·8독립선언, 3·1운동 같은 거대한 독립운동 소식이 계속 들려오면서 더욱 구제화되어 갔다. 교민 100여 명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규칙기초위원 10명을 선임하였다.
    기초위원들은 그 해 3월 16일 친목회 회칙을 통과시키고, 회장에 신헌민(申獻民)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회장의 노력으로 350명이 입회하면서 교민친목회는 세력이 신장되었다. 그 뒤 신헌민이 같은 해 6월 일제에 의해 붙잡히면서 공석이 되었으나, 고일청(高一淸)이 회장직을 대행하면서 회세(會勢)를 확장시켜 나갔다. 또한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친목회 소관으로 이관, 운영하면서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 해 9월 22일 총회에서 명칭을 대한인민단이라 고치고 단장에 여운형(呂運亨)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그 해 11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등 요원들을 위한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이동휘는 다섯 가지의 정신적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하였다.
    1920년 1월 9일 총회에서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이라 개칭하고 단장에 여운형, 총무에 선우 혁(鮮于爀), 간사에 김보연(金甫淵)·임재호(任在鎬) 등을 선출하였다. 그 뒤 거류민단제가 1920년 3월 16일 공포, 4월 20일부터 효력이 발생되면서 임시정부 내무부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거류민단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외곽단체로, 19명의 상의원(常議員)과 집행기관으로 총무 밑에 서무·회계·교육·구제 등의 4개과를 두었으며, 간사가 각 과의 업무를 분담, 처리하였다.
    상해 동포사회를 남일구(南一區)·남이구(南二區)·남삼구(南三區)·동구(東區)·서구(西區)·북구(北區) 등 6개구로 나누고, 구장을 두어 통신·납세 등의 사무를 분장하게 하였다. 상해 거류민수는 당시 18세 이상의 남자가 367명, 여자가 91명, 18세 이하의 남자가 47명, 여자가 33명으로, 성별로 보면 남자 414명, 여자 124명이며, 남녀 총계는 538명이었다.
    거류민단 제규정에 따르면, 거류민이 500명 미만일 때는 15명, 500명 이상 1,000명 이하일 때는 20명의 상의원을 선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20년 10월 상해대한인거류민단 의원은 모두 17명으로 한진교(韓鎭敎)·서병호(徐丙浩)·이유필(李裕弼)·선우 혁·김인전(金仁全)·장붕(張鵬)·김태연(金泰淵)·김순애(金淳愛)·안병찬(安秉瓚)·윤기섭(尹琦燮)·김구(金九)·김홍서(金弘敍)·여운홍(呂運弘)·이광수(李光洙)·도인권(都寅權)·최창식(崔昌植)·김원경(金元慶) 등이다.
    의원명단을 살펴보면 거류민단 운영은 대부분 임시정부 요인에 의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925년경 임시정부에서는 거류민단의 운영만 관장하고, 정부요원으로 하여금 상의원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1921년 1월 신임단장에 장붕, 총무에는 김보연, 간사에는 강경선(康景善)이 새로 보임되었으며, 사무실도 강녕리(康寧里)에 마련되었다. 거류민단은 자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의경대(義警隊)를 조직, 운영하고 인성학교(여운형 형제가 교장 역임)를 운영하여 독립운동가 자제를 교육시켰다. 1920년 10월 7일 임시정부 내무부령 제4호로 교민단제가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임정(臨政)과 이동녕연구(李東寧硏究)』 ( 이현희 ,일주각,1989)

    •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 ( 이현희 ,집문당,1982)

    •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1∼4(국사편찬위원회,1971∼1974)

    •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애국동지원호회,1956)

    • 독립신문(獨立新聞)

    • 『朝鮮獨立運動』 Ⅰ·Ⅱ( 金正明 編,原書房,1967)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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