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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춘령(先春嶺)

    고려시대사지명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 등이 동북여진(東北女眞)을 축출하고 새로 개척한 지역의 동북쪽 경계에 있었던 영(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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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선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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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
    선춘현(先春峴)
    분야
    고려시대사
    유형
    지명
    성격
    영(嶺)
    시대
    고려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 등이 동북여진(東北女眞)을 축출하고 새로 개척한 지역의 동북쪽 경계에 있었던 영(嶺).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공험진(公嶮鎭) 관할 구역 내에 있었다. 조선 초기 세종 때까지도 함길도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의 동북쪽 700리에 위치해 경계를 이루었다.
    선춘현(先春峴)이라고도 표기하였다. 경원도호부의 동림성(東林城)을 출발해 북쪽으로 5리쯤에 소다로영터[所多老營基], 다시 북쪽으로 30리에 회질가탄(會叱家灘), 거기서 강을 건너 10리에 현성(縣城), 그리고 북쪽 90리에 어라손참(於羅孫站)이 있다.
    거기서 다시금 북쪽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 북쪽 60리에 유선참(留善站), 동북쪽 70리에 거양성(巨陽城), 그리고 서쪽으로 60리에 선춘현에 이른다.
    본래 선춘령에는 윤관이 9성(城)을 쌓았는데, 9성의 하나인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석 4면에 글이 있었던 것을 호인(胡人)이 뭉개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뒷날 어떤 사람이 그 밑둥을 파보았더니 ‘高麗之境(고려지경)’의 넉 자만이 있었다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선춘령과 그 비가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뒷날 연구자들에 의해 윤관의 9성 범위가 논의의 대상이 되면서부터이다. 실학자들은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진출한 것이 아니라 길주 이남에 한정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민족항일기 때의 학자들은 그 범위가 함흥평야에 한정된다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선춘령은 마운령(摩雲嶺)에, 때로는 함관령(咸關嶺)에 비정되기도 하였다. 길주 이남설에 비정되는 것은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동국지리지)』에 근거한다.
    한백겸은 마운령상(摩雲嶺上)에 존재하는 석추구기(石樞舊基)가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막연히 윤관의 정계비일 것이라는 오인하였다. 함흥평야설에 비정되는 논리적 근거는 『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기록을 탁상공론이었다고 일축한 데 기인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방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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