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복 ()

임관정요 / 안정복
임관정요 / 안정복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인 『동사강목』을 저술하였으며,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천주교 배척에 앞장선 학자.
이칭
백순(百順)
순암(順菴), 상헌(橡軒)
이칭
한산병은(漢山病隱), 우이자(虞夷子)
시호
문숙(文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12년(숙종 38)
사망 연도
1791년(정조 15)
본관
광주(廣州)
출생지
제천
주요 관직
목천현감|사헌부감찰|가선대부
내용 요약

안정복은 조선후기 「치통도」·「동사강목」·「천학문답」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12년(숙종 38)에 태어나 1791년(정조 15)에 사망했다. 어려운 초년을 보내며 독학으로 유교 경전과 병서·불교·노자·소설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독서했고 역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35세에 이익의 문인이 되면서 학문이 더욱 깊어졌고 실학적 경세론을 펴기도 했다. 1772년에 세자익위사 관원으로 세손의 교육을 맡은 인연으로 정조 집권 후 지방관으로 나가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는 기회도 가졌다. 천주교가 사회문제가 되자 철저히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정의
조선 후기에,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인 『동사강목』을 저술하였으며,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천주교 배척에 앞장선 학자.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 · 한산병은(漢山病隱) · 우이자(虞夷子) · 상헌(橡軒). 제천(提川) 출신. 안신행(安信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안서우(安瑞羽)이고, 아버지는 증 오위도총부부총관 안극(安極)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조에 태조를 도와 가문을 연 안방걸(安邦傑)로부터 대대로 중앙의 고급관료를 지냈으나, 안정복의 가까운 선조에 이르러 영락하였다. 고조 안시성(安時聖)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 안신행(安信行)은 종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이었다. 조부대에 이르면 남인의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더욱 영락한 환경으로 전락하였다. 안정복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다. 또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일생을 주1로 지낸 부친 안극을 따라 오랜 동안 자주 이사를 하였다. 그 결과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소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친 · 외가의 족적인 범위 내에서 학문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무주(茂朱) 적상산에 들어가자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편, 외가인 전라남도 영광에도 부친과 함께 자주 왕래하였다. 외가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관계로 외가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안정복은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어머니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李氏)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 복거하던 안정복의 일가는 1735년 조부의 사망으로, 이듬 해 고향인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慶安面 德谷里: 현재 경기도 광주시 경안면 덕곡리, 일명 텃골)로 돌아와 살았다. 텃골로 돌아와 ‘순암(順菴)’이라는 소옥(小屋)을 짓고 학문 생활에 몰입하였다. 가학(家學)을 기본으로 경사(經史) 이외에 음양(陰陽) · 성력(星曆) · 의약(醫藥) · 복서(卜筮) 등의 기술학(技術學)과 손자(孫子) · 오자(吳子) 등의 병서, 불교 · 노자(老子) 등의 이단사상, 그리고 패승(稗乘) · 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방술가(方術家)라는 비칭을 듣자, 스승 이익(李瀷)으로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충고를 듣기도 하였다.

1737년에는 중국의 삼대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치통도(治統圖)』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도통도(道統圖)』를 지었다. 이듬해에는 『치현보(治縣譜)』를 저술했으며, 이어 동약(洞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향사법(鄕社法)』을 지었다. 그 뒤 1740년 29세에는 안정복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하학지남(下學持南)』 상 · 하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안정복의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윤리적 지침서로서 온 정렬을 기울였던 저술이다. 한편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井田說)』을 내 놓았고,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내범(內範)』을 짓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유형원(柳馨遠)『반계수록(磻溪隨錄)』을 구해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1775년에 「반계연보(磻溪年譜)」를 찬하였다.

1746년에는 광주 안산면 성촌리(安山面 星村里: 현재 안산시 성포동)에 거주하던 이익(李瀷)을 찾아 문인이 되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연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익과의 만남은 안정복의 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이익의 문인들과 학문적 토론을 진지하게 하였다. 윤동규(尹東奎) · 이병휴(李秉休) 등은 동료나 선배로서, 권철신(權哲身) · 이기양(李基讓) · 이가환(李家煥) · 황덕일(黃德壹) · 황덕길(黃德吉) 등은 후학 또는 제자로서 이때부터 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어느 정도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35세라는 장년기를 가학(家學)으로 보낸 탓에, 여기에서 형성된 자기 나름의 학문체계(學問體系)와 사유구조(思惟構造)는 성호를 비롯한 문인들과의 교류에서도 쉽게 변화되지 않았다. 안정복이 다른 실학자들 보다 개혁적인 면에서 참신성이 덜 하고,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것도 이러한 가학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749년 문음(門蔭)직인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해 이듬 해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고, 1752년에는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 해에는 사헌부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사망과 자신의 건강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그 동안 준비해온 저술들을 정리해 1756년 「이리동약(二里洞約)」을 짓고, 이듬해 이를 바탕으로 『임관정요(臨官政要)』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을 1759년에 일단 완성하였다. 그리고 계속해 1767년에는 중국의 당 왕조의 역사인 『열조통기(列朝通紀)』를 저술하는 한편, 1753년에는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道東錄)』을 『이자수어(李子粹語)』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1762년에는 이익이 일생 정열을 바쳐 저술한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목차 · 내용 등을 첨삭, 정리한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정복의 학문은 더욱 깊어 갔으며, 이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1772년부터 1775년까지 세자익위사의 익찬(翊贊)과 위솔(衛率) 등이 되어 세손(뒤에 정조)의 교육을 맡았다. 이 때 세손이 성리학에 대해 질문하자, ‘ 이이(李珥)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 근본이 있으므로 이황의 학설을 좇는다.’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1776년에는 충청도의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 자신이 쌓아온 성리학자로서의 경학지식(經學知識)을 마음껏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3년 동안 그곳에서 수행한 주요 치적은 동약(洞約) · 향약(鄕約) · 향사례(鄕射禮)의 실시, 방역소(防役所)의 설치, 사마소(司馬所)의 복설 등이다. 이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 등을 역임한 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으로 보냈다. 고향 덕곡리에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 혹은 이택재)라는 재실을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평시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여택재는 그 뒤 소실되었으나 1970년대에 다시 정부의 도움으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말년에는 주2 이외의 이단사상(異端思想)의 배척에 앞장섰다. 서학, 특히 천주교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도전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1785년(정조 9)에 『천학고(天學考)』『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해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는 곧 현실세계의 명분론적(名分論的)인 위계질서의 옹호이며, 이러한 사상은 일체의 반성리학적인 사상이 담긴 도교나 불교, 심지어는 양명학까지도 부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보수적인 사회사상은 당시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독주의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안정복은 생전 노론 천하인 1790년에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사후인 1801년에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僻派)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아, 정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광성군(廣成君)에 추봉되었다. 이런 이유로 성호학파의 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관료로서 현달(顯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직생활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 듯하다. 부친의 평생 처사 생활로 주3을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 팔아버린 종답을 다시 사기 위해 노비와 함께 숯을 굽기까지 하였다.

안정복은 18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변화기에 살면서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적인 측면의 고양과 서구문물 가운데, 특히 천주교 배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익을 만나기 전인 1746년까지는 자신의 학문적인 경지를 스스로 형성해 갔던 일개 선비에 불과하였다. 스스로 학문 연마과정에서 이룩한 『임관정요』와 『하학지남』은 안정복의 초기 사상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전자는 뒷날 유형원의 『반계수록』의 영향과 이익의 견해로 보완되었지만, 중심 사상은 청년기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관정요』는 후대 정약용(丁若鏞)『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하학지남』은 주자의 『소학』을 모방한 것으로, 저술의 기본이념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고 밝히면서 기초학문인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의 이기논쟁을 직 · 간접적으로 반박하였다. 1744년에 접한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안정복의 학문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현실의 개혁문제에 대해 관심을 경주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1746년 이익을 방문해 문인이 되면서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 무렵 이익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운집하였다. 특히 안정복과 깊은 교류관계를 가진 사람은 인천에 살던 윤동규와 충청도에 거주했던 이익의 조카인 이병휴 및 경기 안산의 이익의 자인 이맹휴(李孟休), 그리고 이인섭(李寅燮) · 이구환(李九煥)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경기 남부와 충청도에 거주했고, 전통적으로는 퇴계학통을 이었다. 이들은 영남남인들과도 교류를 유지했는데, 이상정(李象靖)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익의 문인이 된 뒤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역사학에 대한 시각, 그리고 서구사상의 접촉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이 1715년경에 쓴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이 때 접하여 보고 성리학에 대한 자신감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이후 성리학을 논할 때는 이익의 견해를 바탕으로 정이 · 정호 · 주희 · 이황의 계제적인 이론의 근원성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하였다.

한편, 유형원의 『동사강목범례(東史綱目凡例)』를 효시로 하여, 이익의 조언으로 편찬된 역사서인 『동사강목』은 유형원→이익→안정복으로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안정복이 『반계수록』을 통해 이익을 찾았고, 이익을 통해 유형원을 더욱 자세하게 배운 결과이다. 따라서 이익을 통해 학문과 사상의 깊이와 폭을 더했고, 이에 자신의 학문은 더욱 견고해져 나름의 경험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동사강목』은 안정복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익이 죽은 뒤부터 자신이 이익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료와 후학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표방하였다. 말년에 이르면서 정치권은 정적인 노론의 전권시대로 접어들고, 이익의 문인들 사이에도 천주교의 만연과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전통적인 성리학적 가치관의 쇠퇴를 드러내면서 사상적인 갈등을 보였다. 이에 이단사상의 배척을 표면화하고 이론적인 무장과 정치참여를 통해 행동으로도 실천하려 하였다. 1785년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 · 권철신 등이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그 이단성을 경계하였다. 이어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리의 이단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제자이면서 사돈지간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내 경계시켰다. 따라서 안정복의 역사상의 위치는 성리학의 전통이 내재적으로 발전되는 과정과 대외적인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세계관의 확대에 따른 근대 사상의 전개가 요구되는 과도기에 해당된다.

안정복은 이 시기 참신한 개혁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근기남인(近畿南人)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인물이었다. 정치적인 업적이나 경세적인 실천보다는 학문적 ·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공헌이 더욱 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안정복의 학문적인 성과는 많은 저술로 나타났다. 안정복의 저술은 20여 편이 전하며, 『잡동산이(雜同散異)』나 『사론(史論)』 등은 일정한 형식을 갖춰 정리된 저술은 아니지만, 안정복의 경학관이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암문집(順菴文集)』
『성호문집(星湖文集)』
『소남문집(邵南文集)』
『정산잡저(貞山雜著)』
『순암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연구』(강세구, 혜안, 1996)
『동사강목 연구』(강세구, 민족문화사, 1994)
『순암 안정복연구』(심우준, 일지사, 1985)
「광주안씨 고문서해제」(안승준, 『고문서집성』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안정복」(황원구, 『한국시민강좌』6, 一潮閣, 1990)
「조선후기 광주와 수원지방의 향약: 안정복의 이리동약과 우하영의 향약설을 중심으로」(최홍규, 『기전문화』5, 1989)
「순암 안정복의 사회사상」(한상권, 『한국사론』17, 서울대, 1987)
「순암 안정복의 조선시대인식: 열조통기의 사론을 중심으로」(김세윤, 『부산여대사학』4, 1986)
「안정복의 열조통기에 대한 일고찰」(김세윤, 『부산여대사학』 3, 1985)
「순암 안정복의 향촌자위론연구」(반윤홍, 『군사』5,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2)
「신후담·안정복의 서학비판에 관한 연구」(최동희, 고려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76)
「안정복의 하학지남고」(윤남한, 『인문과학』7-8, 1973)
「순암 안정복의 생애와 사상」(이구용, 『강원대학논문집』6, 1972)
「안정복의 천학론고」(이원순, 『이해남화갑기념 사학논총』, 1970)
주석
주1

예전에,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우리말샘

주2

중국 송나라 때의 정호(程顥), 정이(程頥)와 주희 계통의 성리학을 이르는 말. 송나라 때에 일어난 신유학(新儒學)이다.    우리말샘

주3

조상의 제사에 쓰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성과 본이 같은 집안에서 관리하고 소유하는 논.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황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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