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고 하여 쳐들어오려 하자,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으로서 통군사(統軍使) 최사위(崔士威) 아래 판관(判官)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通州: 宣川)에 가서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거란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자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를 비롯한 고려 군사는 적과 싸워 기세를 떨쳤으나, 적을 업신여기다가 패배를 당하고 적은 계속 남하하여 개성을 함락시켰다.
1030년 어사민관시랑(御史民官侍郎)으로서 사신이 되어 일행 293명과 함께 송나라에 다녀왔다. 1033년(덕종 2) 11월 서경부유수 지분사호부사(西京副留守知分司戶部事)가 되었고, 1039년(정종 5) 1월 춘하번서북로병마사(春夏番西北路兵馬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9월 공부상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