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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流刑)

    조선시대사제도

     오형(五刑)의 하나로,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하는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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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칭
    유배
    분야
    조선시대사
    유형
    제도
    시대
    조선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오형(五刑)의 하나로,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하는 형벌.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유배(流配)라고도 한다. 중한 죄를 범했을 때 차마 사형에는 처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귀양·정배(定配)·부처(付處)·안치(安置)·정속(定屬)·충군(充軍)·천사(遷徙)·사변(徙邊)·병예(屛裔)주 01)·투비(投畀)주 02) 등으로 표현하였다. 또 간단히 배(配)·적(謫)·방(放)·찬(竄)·사(徙) 등으로도 불렀다.
    삼국시대 신라에는 유형으로 보이는 사변형(徙邊刑)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형법지에는 유 2,000·2,500·3,000리 3등급으로 구분된 유형이 오형의 하나로 규정되어 있다. 이에는 속형(贖刑)이 허용되어 유 2,000리는 장(杖) 17에 배역(配役) 1년과 속동(贖銅) 80근, 2,500리는 장 18에 배역 1년과 속동 90근, 유 3,000리는 장 20에 배역 1년과 속동 100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명률(大明律)』을 형법전으로 적용하였다. 그런데 반드시 장형을 함께 처해 장 100에 유 2,000·2,500·3,000리의 3등급이 있었다. 또한 『대명률』에 동전(銅錢)이나 오승포로써 형을 면제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실정에 알맞지 않아 1402년(태종 2)에 유죄수속법(流罪收贖法)을 제정하였다. 그 내용은 [표 1]과 같다.
    [표 1] 유죄 속량(流罪贖量)
    구분(區分)명률(明律)유죄수속법(流罪收贖法)
    유(流)3,000리(里)2,500리2,000리1,680리1,230리1,065리
    속동(贖銅)36관(貫)33관30관24관22관20관
    오승포(五升布)180필(匹)165필150필360필330필300필
    한편, 명률의 유형제는 중국을 대상으로 한 형벌이었으므로 국토가 좁은 우리 나라에서는 명률을 적용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1430년(세종 12)에 유죄인(流罪人)의 배소(配所)가 우리 실정에 맞도록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을 제정하였다. 그 내용은 [표 2]와 같다.
    [표 2] 유죄인 배소 일람(流罪人配所一覽)
    구분(區分)유삼천리 배소(流三千里配所)유이천오백리 배소(流二千五白里配所)유이천리 배소(流二千里配所)
    경성·경기·유후사경상·전라·평안·함길도내 30식외 빈해각관(息外濱海各官)경상·전라·평안·함길도내 25식외 각관(息外各官)경상·전라·평안·함길도내 20식외 각관
    충청도함길도내 30식외 각관함길도내 25식외 각관함길도내 20식외 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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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전라·평안도내 30식외 빈해각관전라·평안도내 25식외 각관전라·평안도내 20식외 각관
    황해도강원·함길도내 30식외 빈해각관강원·함길도내 25식외 각관강원·함길도내 20식외 각관
    함길도경상·전라도내 30식외 빈해각관경상·전라도내 25식외 각관경상·전라도내 20식외 각관
    평안도강원도내 30식외 빈해각관강원도내 25식외 각관강원도내 20식외 각관
    의금부나 형조에서 유배형을 받으면, 도사 또는 나장들이 지정된 유배지까지 압송하였다. 그곳에서 고을 수령에게 인계하고, 수령은 죄인을 보수 주인(保授主人)에게 위탁하였다. 보수 주인은 그 지방의 유력자로서 집 한 채를 거주할 곳으로 제공하고 유죄인을 감호하는 책임을 졌다. 그곳을 '배소' 또는 '적소(謫所)'라고 하였다.
    배소에 있는 유죄인의 생활비는 그 고을이 부담한다는 특명이 없는 한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가족의 일부 또는 모두가 따라가게 마련이었다. 1449년(세종 31) 휘지(徽旨)에 따라 유배인의 처첩 및 미혼 자녀는 함께 살게 하고 조부모·부모 및 기혼 자녀도 오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유형은 원래 기한이 없이 종신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죄가 감등되거나 단순한 자리 이동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기도 하고 사면으로 형이 풀리기도 하였다. 사령(赦令)이 일 년에도 몇 번씩 너무 자주 내린 탓인지, 1762년(영조 38) 고을 수령을 허위로 고소한 이천 사람 이득룡(李得龍)에게 물한년정배(勿限年定配)를 명한 것처럼 물한년의 조건을 붙인 형을 내린 예가 가끔 보인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변방으로 내쫓음
    주02
    왕명으로 지정한 곳에 죄인을 귀양 보냄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전봉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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