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염주(鹽州: 지금의 황해도 연안)이다. 최우(崔瑀)의 문객으로 대장군(大將軍)인 이송(李松)의 아들이다.
아우 이습(李槢)과 함께 김준(金俊)의 심복이 되어 행수지유(行首指諭)가 되고 뒤이어 장군이 되어 원종의 총애를 받았다.
임연(林衍)이 김준을 제거한 뒤 임연에게 포섭되어 대장군(大將軍)·직문하(直門下)가 되었다가 뒤이어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추밀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지주사(知奏事)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충렬왕이 서북면에 행차하여 원나라에서 오는 공주를 맞이할 때 순안공(順安公) 왕종(王悰)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이때 왕이 이분희 등이 변발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하였다. 1276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세자의 조호(調護)가 되었다.
1277년 위득유(韋得儒)와 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金方慶)을 무고하여 원나라 장수 흔도(忻都)와 홍다구(洪茶丘)의 국문을 받게 되자, 흔도와 홍다구에게 붙어서 김방경을 모함하였다. 1278년 2월에는 밀직사사(密直司事)가 되었으며, 4월 왕이 공주, 세자와 함께 원나라에 갈 때 수행하였다. 그러나 10월 김방경의 무죄가 드려나자 백령도(白翎島)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바다에 던져져 죽었고, 가산은 몰수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