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징지(徵之), 호는 옥동(玉洞)·옥금산인(玉琴散人). 아버지는 대사헌 이하진(李夏鎭)이며, 이익(李瀷)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관직은 찰방에 그쳤다. 충주에 살고 있던 이서가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은 1694년(숙종 20)에 당시 좌의정이었던 박세채(朴世采)의 천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글씨를 잘 썼는데, 진체(晉體)의 필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필법을 계발하여, 『성재집(性齋集)』에서 이르기를 “동국(東國)의 진체(眞體)는 옥동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