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

현대문학
인물
일제강점기 「아버지를 찾아서」 · 「광인기」 · 「유랑」 등을 저술한 소설가. 언론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이석훈(李錫壎), 금남(琴南), 석훈생(石薰生), 이훈(李薰), 석훈(錫壎), 석정훈(石井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7년 1월 27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
정의
일제강점기 「아버지를 찾아서」 · 「광인기」 · 「유랑」 등을 저술한 소설가. 언론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명은 이석훈(李錫壎)이고 호는 금남(琴南)이다. 필명으로 이석훈(李石薰)·이훈(李薰)·석훈생(石薰生).석훈(錫壎) 등을 썼으며, 창씨개명한 이름은 이시이군(石井薰) 혹은 마키히로시(牧洋)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1월 27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정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20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면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여 졸업하고, 조도전대학 노문과에 진학하였다. 1928년 아버지가 운영하던 새우(白蝦)가공공장이 화재로 파산하자 중퇴하고 귀국해서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 방송국 직원 등을 전전하면서 작가생활을 하였다.

1929년 10월 31일부터 11월 7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아버지를 찾아서」로 등단하였다. 1930년 3월 4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궐녀는 왜 자살했는가」가 당선되었다. 1931년 5월부터 1933년 3월까지 개벽사가 발간하는 『제일선』에서 근무하였다. 1933년 4월 경성에 와서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하고 같은 해 초여름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과(조선어방송) 아나운서로 방송을 시작하였다. 1936년 경성방송국 방송주임으로 승진하였고, 소설집 『황혼의 노래』를 발간하였다. 1938년 함흥방송국 방송과장으로 옮겼다가 1939년 5월 조선일보사 출판부로 이직하여 『조광』, 『여성』 등의 잡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다가 이후 『일본공업신문』 경성지국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기 주요 작품으로 「광인기(狂人記)」(1934),「이주민열차(移住民列車)」(1935), 「방랑아」(1935), 「애증(愛憎)」(1935), 「범인」(1935), 「결혼」(1936), 「카이제르와 이발사」(1939), 「유랑(流浪)」(1940) 등이 있다.

1940년 12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시국강연부대 연사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훼절의 길을 걸었다. 1941년 2월 조선문인협회 회원으로 2월 8일부터 9일까지 부여신궁 조영공사(造營工事)에 참석한 후 그 소감문인 「부여기행」을 1941년 3월 『신시대』에 발표하였고,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호국신사어조영지(龍山護國神社御造營地) 근로봉사에 참여하였다.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위촉되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 경성지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11월 『일본공업신문』 경성지국을 사임하고 조선문인협회 상무간사로 사무일체를 관장하였고, 같은 달 민간 내선일체 단체인 녹기연맹의 기관지 『녹기』 편집부 촉탁을 맡았으며, 11월 15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 간담회에 참석하였으며, 11월 17일부터 29일까지 조선문인협회 사업의 일환인 ‘황군의 무운장구 기원과 함께 총후에서의 정신운동 수련’ 달성을 위해 일본에 성지순배사(聖地巡拜使)로 파견되어 신사·신궁·천황무덤들을 순례하였다.

1942년 1월 국민총력경기도연맹이 주관한 ‘국어(일본어)생활실천운동협의회’에 참석하였고, 6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출석하였다. 1943년 1월 「고요한 폭풍」으로 일본정신에 입각해 선전효과가 탁월한 작품에 주는 국민총력연맹 문예상을 받았다.

같은 해 4월부터 1944년 6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회 간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 4월 29일 조선문인보국회 주최로 일본 남방종군작가를 맞이한 환영교환회에 참석하였고, 5월 조선문인보국회 결성기념 문예전에 총력연맹상 상장과 상패 등을 출품하여 전시하였다. 1944년 『만선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였고, 6월 결전태세 즉응재선문학자(決戰態勢卽應在鮮文學者) 총궐기대회에서 만주대표로 안내를 맡았다. 1945년 중국 장춘(長春)에서 전쟁참여를 독려하는 집필과 단체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각종 좌담회와 방문 및 행사 그리고 여러 잡지에 발표한 글을 통하여 징병, 지원병을 선전하고 선동하였으며, 내선일체와 황민화의 연원을 백제시대부터로 올라가는 것으로 설정하고 이를 필연적인 것으로 알리는데 앞장섰으며, 영국과 미국을 비난하여 적개심을 고취시키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였다. 대표적인 글로 「사비루의 달밤」(『문장』, 1941.4), 「반도의 신문화라는 것」(『녹기』, 1941.11), 「성지참배통신」(『조광』, 1942.1), 「문화인·지식인에게 격(激)함」(『반도의 빛』, 1942.2), 「징병·국어·일본정신」(『조광』, 1942.7), 「행군」(『국민문학』, 1943.7), 「전시하의 만주」(『조광』, 1944.11), 『요모기섬 이야기』(보문사, 1945. 3) 등이 있다.

해방이 되자 1945년 9월 귀국하여 칩거하면서 번역작업을 하다가 1947년 1월에 『백민』에 「고백」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인 1947년 『순국혁명가열전』(조선출판사), 『문학감상독본』(편저, 백민문화사), 『황혼의 노래』(재판, 조선출판사)를 발간하였다.

1948년 해안경비대가 창설될 무렵 해군 정훈장교 중위로 입대하여 1949년 국방부 정훈국을 거쳐 해군본부 소령으로 진급하였고 초대 정훈감 서리를 역임하다 1950년 초에 전역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7월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같은 달 하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후 행적이 묘연하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3(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 2(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현대문학대사전』(권영민,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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