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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고대사개념용어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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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임나일본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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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고대사
    유형
    개념용어
    시대
    고대-초기국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이는 일제가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식민사관 중에서,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부터 외세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의 대표적인 산물의 하나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도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 등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은 그를 통해 태고 때부터의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하였다.
    그 뒤 메이지 연간(明治年間, 1868∼1911)에 문헌고증의 근대 역사학이 성립되면서, 국학연구의 전통을 이어받은 간[菅政友]·쓰다[津田左右吉]·이마니시[今西龍]·아유가이[鮎貝房之進] 등은 일본의 임나 지배를 전제하고 주로 임나관계의 지명 고증작업을 행하였다.
    이어 스에마쓰[末松保和]는 『대일본사(大日本史)』(1933)의 한 편으로 「일한관계(日韓關係)」를 정리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선경영론을 완성시켰으니, 그것이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1949)였다. 그의 임나일본부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지』 위서 왜인전 서두의 문구로 보아, 3세기 중엽에 이미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라를 점유하고,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해 삼한에 통제력을 미치고 있었다.
    둘째, 『일본서기』진쿠황후[神功皇后] 49년조의 7국 및 4읍 평정기사로 보아, 369년 당시 왜는 지금의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일부를 귀복시켜 임나 지배체제를 성립시키고, 백제왕의 조공을 서약받았다.
    셋째, 광개토왕비문의 기사로 보아, 왜는 400년 전후해서 고구려군과 전쟁을 통해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한 복속관계를 강화하였다.
    넷째, 『송서(宋書)』 왜국전에 나오는 왜 5왕의 작호로 보아, 일본은 5세기에 외교적인 수단으로 왜·신라·임나·가라에 대한 영유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받았으며, 백제의 지배까지 송나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였다.
    다섯째, 『남제서(南齊書)』 가라국전 및 『일본서기』 게이타이왕[繼體王] 때의 기사들로 보아, 일본은 5세기 후반에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완화되기 시작해 6세기 초반에는 백제에게 전라남북도 일대의 임나땅을 할양해 주기도 하고,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 등을 약탈당하기도 하면서 임나가 쇠퇴하였다.
    여섯째, 『일본서기』긴메이왕[欽明王] 때의 기사들로 보아, 540년대 이후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했으나, 결국 562년에 신라가 임나 관가를 토멸함으로써 임나가 멸망하였다.
    일곱째, 그 뒤에도 일본은 임나 고지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신라에게 임나의 조(調)를 요구해 받아내었다.
    즉, 임나일본부설은 왜왕권이 한반도의 임나지역을 정벌해 현지에 설치한 직할통치기관으로서, 왜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가야를 비롯해 백제·신라 등의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원사료 편찬과정에 상당한 조작이 가해졌다.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며, 「광개토왕비문」이나 『송서』 왜국전의 문헌기록은 과장되게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헌사료상의 문제점 외에 그 주장의 사실관계만 검토해 보아도 임나일본부설의 한계성은 곧 드러난다. 김석형(金錫亨)의 연구에 따르면, 기나이[畿內]의 야마토세력[大和勢力]이 주변의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가능했다고 하며, 이러한 견해는 일본학계에서도 이제 통설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야마토국가가 멀리 떨어진 남한을 4세기부터 경영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내부 성장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대외관계를 우선적으로 언급한 일본고대사 자체의 맹점이었다.
    또한, 왜가 임나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 고분 발굴자료들에 의하면 4세기 이전의 유물문화가 5, 6세기까지도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즉, 일본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증거가 문화유물에 반영된 바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서의 문헌사료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스에마쓰에 의해 학문적으로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김석형의 일본고대사 자체에 대한 반론이 1960년대에 발표되자, 그 충격에 의해 1970년대 이후 일본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노우에[井上秀雄]는 『일본서기』의 사료계통의 원전을 분석, 부레쓰기[武烈紀] 이전 기록의 신빙성을 의문시하고 그들 기록에 의한 더 이상의 상상을 배제하였다.
    반면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는 4세기 말의 왜군이나 긴메이기[欽明紀]에 나타나는 6세기 전반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신뢰할 수 있되 이들은 야마토왕조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실태는 왜인으로 칭하는 임나의 지방호족이 일본의 중앙귀족이나 지방호족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한 것이고, 그들은 백제·신라의 접촉지대에 있던 일본부의 군현을 통치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임나일본부는 왜인을 자칭하는 가야의 한 지방세력에 의한 독립소국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학자의 연구결과 중에서 왜왕권의 임나지배를 부인한 최초의 것이다.
    우케다[請田正幸]는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는 6세기 전반의 안라(安羅)주 01)에 있던 일본부만을 가리키며, ‘일본부(日本府)’의 고훈(古訓)은 ‘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그 뜻은 일본왕이 임시로 파견한 사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요시다[吉田晶]도 우케다와 비슷한 입장에 서면서, 6세기 전반의 기나이 세력은 국가형성의 주체세력으로서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하는 것에 주안을 두고 임나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므로, 일본부는 왜왕권에서 파견된 관인(官人)과 가라제국의 한기층(旱岐層)으로 구성되어 상호간의 외교 등 중요사항을 논의하는 회의체였다고 보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기토[鬼頭淸明]는 우케다나 요시다와 같은 견해이면서도, 당시에 관인을 파견해 임나일본부에 의한 공납 수령체제를 형성시킨 주체인 왜는 야마토 왕권이 아니고 그에 선행하는 일본열도 내 별개의 정치세력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야마오[山尾幸久]는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재검토하고 백제사와의 관련성을 첨가해, 왜왕권이 임나 경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5세기 후반 백제의 대신이면서 임나의 지배자였던 목만치(木滿致)가 왜국으로 이주한 이후부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맞이함으로써 임나에 대한 연고권을 갖게 된 왜왕권이 가야지역에 관인을 파견해 구성한 것이 임나일본부이며, 5세기 후반에는 직접 경영이었고,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왕을 사이에 낀 간접 경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오야마[大山誠一]는 6세기 전반에 백제·신라에 의해 독립을 위협받던 가야제국과 현지 거주의 일계인(日系人)이 야마토 왕조에 요청해, 게이타이왕 26년(532년으로 고증)에 아후미노게나노오미[近江毛野臣]가 파견됨으로써 임나일본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즉, 가야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가야제국의 왕과 야마토에서 파견된 관인이 일종의 합의체를 구성한 것이 임나일본부인데, 562년 가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스즈키[鈴木英夫]는 임나일본부의 존립 시기와 의의를 극도로 축약한 연구를 보여주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 재지 지배층의 요청에 의해 530년에 왜왕권에서 게나노오미가 군사집단을 이끌고 안라에 파견됨으로써 성립되었으나, 이듬해 백제군대가 안라로 진주함으로써 실질적인 활동, 즉 임나 지배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근래의 일본인학자들의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종래에 비해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첫째, 『일본서기』의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성립 시기를 4세기 중엽으로 설정하는 고정적 관점에서 후퇴해 대체로 6세기 전반으로 제한해 보고 있다.
    둘째,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왜왕권이 임나를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왜왕권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 수용하기 위해 임나에 파견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고 있다.
    셋째, 임나일본부의 존립 이유를 왜의 군사적 압제에서 구한다기보다 백제·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야제국의 자주적 의지에서 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서 일단 진일보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와 야마토 왕조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견해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이전의 일본고대사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점이라 하겠다.
    일본열도 내의 기본적인 세력판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모든 대외관계의 주체를 기나이의 왕가로 돌려서 보려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타당할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재지세력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주된 관심을 일본부 자체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가야지역 내의 가야인의 대응방식에는 소홀하고, 『일본서기』를 찬술한 이래 일본의 일방적인 관점이 강조되어 여전히 실태 파악의 균형을 잃고 있다.
    국내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금기시해 외면하고 체계적 반론을 펴지 않고 있다가 1970년대 후반 이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천관우(千寬宇)는 『일본서기』의 임나관계 기록들을 재해석, 기록의 주어를 왜왕이 아닌 백제왕으로 봄으로써 ‘왜의 임나 지배’가 아닌 ‘백제의 가야 지배’라는 시각으로 가야사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그는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정벌해 백제권에 편입시킨 후, 가야 지배를 위해 설치한 파견군사령부가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5세기부터 6세기 초에는 군사령부가 김천·달성 등의 낙동강 중·상류방면에 있었고, 530년대 이후에는 진주·함안 등의 낙동강 하류방면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현구(金鉉球)는 보다 신중하게 긴메이기의 기록만을 이용해,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다는 천관우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6, 7세기 백제와 야마토 사이의 외교관계의 특징을 용병관계(傭兵關係)로 파악하였다.
    즉,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군령(郡令)·성주(城主)를 파견해 다스렸는데, 6세기 전반에는 일본인 계통의 백제 관료와 야마토 정권으로부터의 용병을 배치시켰다는 것이다.
    이근우(李根雨)는 게이타이기 이전의 4, 5세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천관우의 입론을 수용하면서, 일본열도 내의 세력주체가 6세기 초에 구주(九州)의 왜왕조에서 기나이의 야마토 세력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는 원래 구주의 왜왕조와 관련이 있는 문물 수용의 통로였고, 야마토 세력과는 무관한 것이었는데, 6세기 전반에 야마토 세력이 가야 문제에 말려들어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고권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 것은 백제의 외교적 술수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근래의 국내학자들에 의한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백제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특히, 540년대 이후로 가야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지적한 연구성과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임나일본부를 구주의 왜왕조와 관련시킨 것도 주목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가야가 백제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고 추정한 점은, 앞에 서술한 가야문화의 전대(前代) 계승적인 경향과 어긋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가야사 및 가야의 문화능력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는 백제로부터 명령을 받거나 백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반백제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를 백제 군사령부로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에 소속된 일본인 계통의 관인을 백제의 군령·성주로 동일시하기도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그러므로 문헌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가야 문화의 독자성을 배경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매우 불분명한 것이어서, 왜의 임나 지배에 대한 증빙 자료로 활용될 수는 없다.
    또한 한일간에 근래의 연구 동향에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관련 기사를 모두 조작된 전설로 처리해 이를 토대로 임나의 성립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백제본기』가 인용된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통해,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주 02)에 있었다는 것은 인정된다.
    530년대는 가야연맹이 신라와 백제의 복속 압력을 받아 맹주국인 대가야의 영도력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당시 ‘임나일본부‘를 안라국에 설치한 것은 백제였고, 관리들은 친 백제계 왜인들로 구성되었다.
    성립 초기의 안라왜신관은 백제·왜 사이의 교역 대행기관의 성격을 가지며, 백제는 이를 통해 안라국(함안)·탁순국(창원)을 거쳐 왜국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확보하려고 한 듯하다.
    반면에 안라는 ‘일본부’의 존재를 이용해 대왜 교역 중개기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야연맹 내에서 북부의 대가야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중심세력으로 대두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안라는 530년대 후반 국제관계의 혼란을 틈타 백제의 의사와 관계없이 ‘임나일본부’의 왜인 관리들을 재편성함으로써 기구를 장악하였다.
    그러므로 540년대 이후의 사료상에 나타나는 ‘임나일본부’는 안라왕의 통제를 받는 대왜(對倭) 외무관서로 성격이 변질된 것이며, 그곳의 관리들은 친 안라계 왜인 또는 그들과 가야인 사이의 혼혈계의 인물들로서 안라를 비롯한 가야연맹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가야연맹의 제2인자였던 안라국은 왜와의 교역에서 유리한 입지 조건을 차지하고 있는 이점을 살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도모하기 위해 이를 운영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이 외무관서는 실제와 달리 ‘왜국 사절들의 주재관’처럼 표방되어, 가야연맹을 병합하려고 도모하는 백제·신라의 외교적 공세로부터 가야의 독립성을 연장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550년을 전후해 안라의 왜인 관료 기구가 백제의 압력으로 해체되고 다시 백제의 교역 대행기관으로 변모되었다. 이에 가야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560년경 안라국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결국 이른바 ‘임나일본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런데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7세기 중엽 이후에 성립된 것이므로 6세기 전반에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왜의 임나 지배’라는 선입견이 들어있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폐기하고, 앞으로는 ‘안라에 있던 안라의 왜인 신하들이 일을 보던 곳’이라는 관점에서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스에마쓰에 의해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비판되고 수정되어, 이제는 학설로서의 생명을 거의 잃었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임나관계의 연구들은 서로 근접된 인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①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6세기 전반에 한정해 취급한다든가, ②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지배가 아닌 외교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든가, ③ 임나문제에 대해 백제와 가야의 역할을 중시한다든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세기 이전의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해, 그들 사이의 대외관계사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임나관계 연구는 더 이상의 규명이 어려운 단계에 와 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6세기 중엽 당시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는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의 체계적 연구 이후에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 삼국지(三國志)

    • 송서(宋書)

    • 남제서(南齊書)

    • 일본서기(日本書紀)

    • 『임나일본부연구』(김현구,일조각,1993)

    • 『가야연맹사』(김태식,일조각,1993)

    • 『초기조일관계연구』(김석형,사회과학원출판사,1966)

    • 「가야사연구의 제문제」(김태식,『한국상고사』,민음사,1989)

    • 「일본서기 임나관계기사에 관하여」(이근우,『청계사학』2,1985)

    • 「복원가야사」(천관우,『문학과 지성』28·29·31,1977·1978)

    • 『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金鉉球,吉川弘文館,1985)

    • 『任那日本府と倭』(井上秀雄,寧樂社,1973)

    • 『任那興亡史』(末松保和,吉川弘文館,1949)

    • 『任那考』(菅政友,菅政友全集,國書刊行會,1907)

    • 「加耶·百濟と倭: 任那日本府論」(鈴木英夫,『朝鮮史硏究會論文集』24,1987)

    • 「所謂任那日本府の成立について」(大山誠一,『古代文化』32-9,32-11,32-12,1980)

    • 「任那に關する一試論: 史料の檢討を中心に」(山尾幸久,『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1978)

    • 「任那日本府の檢討」(鬼頭淸明,『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校倉書房,1976)

    • 「古代國家の形成」(吉田晶,『岩波講座 日本歷史』2,1975)

    • 「六世紀前期の日朝關係: 任那日本府を中心といて」(請田正幸,『朝鮮史硏究會論文集』11,1974)

    • 「日本書紀朝鮮地名攷」(鮎貝房之進,『雜攷』7,1937)

    • 「加羅疆域考」(今西龍,『史林』4-3,4-4,1919)

    • 「任那疆域考」(津田左右吉,『朝鮮歷史地理硏究』1,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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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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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 (1995년)
    김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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