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탁 ()

이양편
이양편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공조참판, 한성부좌우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대이(大而)
이양당(二養堂), 치재(恥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2년(명종 7)
사망 연도
1621년(광해군 13)
본관
창녕(昌寧)
주요 관직
공조참판|한성부좌우윤
정의
조선 후기에, 경기도관찰사, 공조참판, 한성부좌우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대이(大而), 호는 이양당(二養堂) 또는 치재(恥齋). 관찰사 조한필(曺漢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언박(曺彦博)이고, 아버지는 조몽정(曺夢禎)이며, 어머니는 홍신(洪愼)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선조 3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95년(선조 28) 의금부도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서정이 문란하고 피폐해졌으므로 소를 올려 시무십책(時務十策)을 개진하였는데, 그 소가 매우 간곡하였으므로 선조가 가상히 여기고 윤허하였다.

1599년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 가을 문과에 오른 뒤 예조·호조·병조의 좌랑·정랑을 역임하고, 사간원정언·시강원사서를 거쳐, 1603년(선조 36) 강원도암행어사가 되었다.

이어 전적·직강·수찬·교리·필선·사예·장령·사옹원정을 역임하고, 1610년(광해군 2) 우승지가 되었다. 사신이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황해도관찰사·형조참판·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12년(광해군 4) 공조참판에 이어 한성부좌·우윤이 되었다.

그 뒤 관직을 떠나 두문불출, 오직 독서에 묻히다가 70세에 죽었다. 그의 집에 소장되어온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나라에 바쳐 임금으로부터 표피(豹皮)를 하사받았으며,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의 공로로 원종1등공신이 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의서(醫書)로 『이양편(二養編)』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포저집(浦渚集)』
관련 미디어 (2)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