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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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출토 초두
금관총 출토 초두
공예
개념
술 · 음식 · 약 등을 끓이거나 데우는 데 사용하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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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술 · 음식 · 약 등을 끓이거나 데우는 데 사용하던 용기.
내용

초두는 대개 다리가 셋 달리고 긴 손잡이가 붙어 있으며 주로 구리로 만들었다. 다리가 있는 것은 초두, 다리가 없는 것은 조두(刁斗)라 불렀는데 이는 요즘의 약두구리와 비슷하다. 고대중국에서는 야전(野戰)에서 낮에는 취사용구로 쓰다가 밤에는 꽹과리 대용으로 이것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다.

초두의 시원은 중국의 삼족토기(三足土器)인 역(鬲)이나 규(鬹)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직접적인 영향은 화(盉)에서 받았다. 현재 기록상 가장 오래된 초두는 중국 한나라의 선제 때 만든 ‘元康元年(원강원년)’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서 원강원년은 기원전 65년에 해당한다.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한사군시대로서 2점의 낙랑초두가 현존하고 있다.

삼국시대 중기에는 자체에서 만들기 시작하였고, 삼국시대 후기에 가장 활발히 제작하였다. 평양 부근의 고구려유적지에서는 철제와 동제가 각각 1점씩 출토된 바 있으며, 금관총·서봉총·식리총·천마총·황오리16호분·황남동98호분과 강원도 원주시 법천리, 서울 풍납동 등지에서 신라와 백제의 초두가 발견되었다. 이들 초두는 대부분 왕릉을 비롯한 대총(大塚)에 국한되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상류층 일부에서만 전용한 듯하다.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초두는 약 30점 정도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는 경주 금관총 출토품과 일본인 오쿠라(小倉武之助)가 경상남도 합천지방에서 출토된 것을 수집하여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이것들은 왕실을 상징하는 용이 조각되어 있어 이채롭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손잡이가 S자형으로 유연하게 휘어지고 다리가 종래의 말발굽 형태에서 벗어나 점차 호랑이의 발 모양으로 바뀐다. 고려시대에는 다리가 없는 것이 많아지며 재료가 청동 외에도 무쇠·청자·흑유 등 다양해진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청동제품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놋쇠·은·백자·분청사기·오지·곱돌 같은 각종 재료로 주전자·약탕관·다관(茶罐)·냄비·약두구리 등등 용도에 알맞게 그릇 형태를 응용하여 제작, 사용하였다.

다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따르는 주구(注口)와 뚜껑이 있고 없음에 따라 외형상 여섯 가지의 초두가 있는데, 각기 그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다. 이 중 다리가 있고 주구와 뚜껑까지 있는 것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다리는 있으나 주구와 뚜껑이 없는 것이다.

이들의 제작은 본래 도성 주변의 구리 생산지와 근접한 장소에서 특수기술인 집단의 장인(匠人)들이 맡았으며, 신라시대에는 철유전(鐵鍮典) 및 축야방(築冶房)에서, 고려시대에는 장야서(掌冶署)에서 관장하였다.

참고문헌

「鐎斗에 관한 일고찰」(金?正, 고려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84)
집필자
김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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