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해저유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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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유물
충청남도 태안반도 해역에서 발굴된 해저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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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태안반도 해역에서 발굴된 해저유물.
개설

태안해저유물은 1976년 신안해저유물 발굴로 촉발된 발견매장문화재의 신고로 1980년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수중탐사로 해저에 유물이 산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집중매장처는 찾지 못했다. 2007년대섬 앞바다에서 주꾸미잡이를 하던 중 청자대접 1점이 올라와 신고한 것을 계기로 긴급탐사를 통해 다량의 청자가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어진 발굴조사로 2만 5천여 점의 고려 청자와 선체를 인양하였다. 청자는 품질이 좋은 강진산이며 화물표인 목간(木簡)이 다량으로 수습되었다.

청자운반선인 태안선의 발굴 중에 마도해역에서 발견신고가 잇따라 광역탐사를 실시하였다. 넓은 해역에 걸쳐 다수의 유물이 산재하고 있어서 연차 발굴계획을 세워 조사를 하고 있다. 2009년부터 매년 1척씩 3척을 발굴하고 마도1·2·3호선으로 명명하였다. 마도해역은 난파선의 공동묘지라 부를 만큼 유물이 넓게 산포되어 있고 종류도 고려 청자와 조선의 분청사기 · 백자뿐만 아니라 중국의 도자기들도 많으며 크고 작은 닻돌 80여 개도 인양하였다. 따라서 마도해역의 수중조사는 장기계획을 세워 탐사와 발굴조사를 진행중이며 조사와 유물의 보존처리를 위해 신진도에 사무소를 건립하였고 유물과 선체를 전시하는 해양유물전시관이 2019년 11월 18일 개관하였다.

그동안 수중발굴유물은 대부분 청자와 그 운반선이었고 난파시기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었다. 2007년에 발굴한 청자운반선인 태안선에서 화물표인 목간이 처음 확인되었고 곡물운반선인 마도해역의 3척의 난파선에서도 목간과 죽찰이 다량으로 확인되어 화물의 내용과 성격은 물론 난파시기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강진에서 만든 양질의 청자를 실은 태안선은 1131년에 난파되었고, 마도1호선은 1208년, 마도2호선은 1200년 무렵, 마도3호선은 1264∼1268년 사이에 난파되었음을 목간을 통해 입증하게 되어 고려의 타임캡슐로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내용
  1. 태안선의 발굴

태안선은 강진에서 만든 청자를 가득 싣고 개경으로 운반하다 태안반도의 신진도 남쪽 대섬 앞 해상에서 침몰하였다. 선체는 외판의 일부만 남아 있었으며 선원의 것으로 보이는 사람뼈도 있었다. 수심 15m 정도에 조류가 약간 강한 해역이나 가시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발굴조건이 양호하였다. 청자의 종류는 대접과 주발 · 접시가 대부분이나 참외모양주전자 · 통모양잔 · 사자모양향로 · 두꺼비모양벼루 · 소형분합 · 유병 · 발우도 있다. 최대경(崔大卿)과 같은 고위관료에게 보내는 목간 옆에 선적된 청자들은 최상품이다. 발우는 매우 양질이며 음각문양이 새겨진 것도 있고 48세트나 되어 의례에 참여하는 승려의 공양에 사용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기법으로 보면 내화토 빚음이 대부분이나 일부 규석받침이 있고 문양수법은 음 · 양각과 퇴화 · 철화 등이며 상감은 전혀 없다. 두꺼비모양벼루는 소형으로 휴대용이며 철화와 퇴화 기법으로 만든 희귀한 작품이다. 사자모양향로는 해학적 표현으로 익살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태안선 발굴에서 나온 목간은 수중에서 확인한 최초의 고려 목간이다. 이 목간을 통해 청자산지로 유명한 강진에서 만들어 개경의 관료와 개인에게 보낸 것을 알 수 있었다. 목간을 통해 청자의 정확한 제작시기는 물론 출항지, 화물의 내용과 수량, 수취인의 이름과 관직, 보낸 사람의 수결 등 청자의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1. 마도 1·2·3호선의 발굴

2009년부터 발굴한 마도1·2·3호선은 지금까지의 청자운반선이었던 태안선과는 달리 곡물을 운반하던 배였다. 화물의 대부분은 벼와 쌀 · 콩 · 메밀 · 조 · 피 · 기장 등 곡물과 건어물 · 메주 · 젓갈류로 채워져 있었다. 세 난파선 모두 화물표인 목간과 죽찰(竹札)이 다량으로 수습되어 선적물의 내용과 침몰연대를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마도1호선에서는『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는 김순영(金純永)이라고 하는 대장군의 이름과 정묘(丁卯) · 무진(戊辰)의 간지가 있어 1207∼1208년 사이에 난파되었음이 분명하다. 마도1호선에 실린 800여점의 도자기 가운데 주목할 유물로는 청자상감표형주자(靑磁象嵌瓢形注子)와 받침대가 있다. 수십 점의 도기는 도량형제도 연구에 학술적 의미가 크고 도기연구의 실증자료로서 중요하다. 더욱이 도기에 담겨진 것이 주로 젓갈류라는 사실을 통해 고려의 식생활문화도 살펴볼 수 있다. 이외에 50kg 정도의 석탄도 실려 있어서 석탄의 사용개시 연대를 고려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다. 침몰연대가 무신권력자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시기이므로 무신집권기 수취체제는 물론 출항지, 거래관계, 운송책임자, 적재단위 등을 알 수 있다. 마도1호선은 전라도의 장흥 · 해남 · 강진 · 나주 등지에서 화물을 싣고 항해하다 1208년 봄마도해역 즉 난행량에서 침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에 발굴한 마도2호선은 마도1호선과 성격이 비슷한 곡물운반선이다. 선체에 실린 청자는 양이 많지 않으나 2점의 최상급 매병이 주목을 끈다. 매병은 음각연화절지문(陰刻蓮花折枝文)과 상감능화형유죽로화훼문(象嵌菱花形柳竹蘆花卉文)인데 높이 39㎝로 크기가 같고 형태가 당당하고 유려하다. 이 매병의 주둥이 옆에서 죽찰이 인양되어 꿀과 참기름을 담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이 “중방도장교오문부택상정밀성준봉(重房都將校吳文富宅上精蜜盛樽封)”으로 개경의 중방(重房) 소속 도장교(都將校)인 오문부(吳文富)에게 올려 보낸 꿀단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매병을 준(樽)으로 불렀다는 것과 매병의 용도가 술이나 물을 담거나 화병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벗어나 꿀과 참기름 같은 고급 식재료의 보관과 운반에 쓰였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자료이다. 양질의 청자연판문통형잔(靑磁蓮瓣文筒形盞) 20점과 대접 25점 한 묶음도 인양되었다. 배에 실린 매병을 비롯한 청자들은 부안에서 생산된 것이다.

마도2호선에서도 쌀 · 콩 · 알젓 등 화물의 종류와 수량 · 수취인 · 발신자 · 발송지가 적힌 목간과 죽찰 30여점이 수습되었다. 마도2호선은 전라도 정읍 · 고창 등지에서 거둔 곡물을 싣고 가다 난행량에서 침몰하였다. 목간과 죽찰에 대경 벼슬의 유(庾)씨와 왕의 친위부대인 견룡(牽龍: 牽龍軍) 소속 기(奇)씨가 주목된다. 무송(茂松)을 본관으로 한 유씨는 고려 인종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문벌(門閥)의 하나이다. 이 시기에『고려사』에 등장하는 기씨 성의 무인으로는 기홍수(奇洪壽: 1148∼1209), 기윤위(奇允偉: 1211년 牽龍指諭), 기존정(奇存靖: 1216년 거란군에 승리) 등이 있다. 한편 대경을 역임한 무송 유씨로는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보이는데 그는 무신정변의 와중에서 무인 오광척(吳光陟), 이광정(李光挺), 문장필(文章弼) 등과 교유관계가 있어 살아남았고, 1213년에는 모든 관직을 내놓고 은퇴하였으므로 마도2호선의 난파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또한 김취려(金就礪) 장군과 함께 거란을 물리친 이극서(李克㥠)라는 인물도 보인다. 따라서 목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활동으로 미루어 마도2호선은 1213년 이전에 난파된 것이 확실하다. 목간에 적힌 유씨 성을 가진 인물이 유자량이 맞다면 그의 관직 경로상 대경에 재임한 시기는 1200년 전후로 추정된다.

2011년에 발굴한 마도3호선은 지금까지 발굴한 고려선박 가운데 선체가 가장 잘 남아 있었다. 배의 이물과 고물 및 돛대를 고정시키는 구조 등이 거의 완형으로 남아 있어 고려시대 선박 구조에 대한 전모를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마도3호선의 남아 있는 규모는 길이 12m, 너비 8m, 깊이 2.5m로 그동안 발굴한 고려선 가운데 가장 크다. 마도3호선도 곡물과 먹을거리를 싣고 가던 배였고 다량의 목간이 수습되었다. 화물 수취인으로 신윤화(辛允和)와 유승제(兪承制)가 보이는데 시랑(侍郞) 신윤화는 1260년(원종 원년)에 장군으로 몽고에 다녀온 기사가 있다. 유승제란 유씨 성의 승선(承宣: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정3품 관직)을 말하는 것으로 원종 초엽 우부승선(右副承宣)이었던 유천우(兪千遇)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수취인으로 나오는 김영공(金令公)은 최씨무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김준(金俊)이라는 인물이다. 김준은 1258년 11월에 정권을 잡았고, 1264년 해양후(海陽侯)에 책봉된 후부터 영공이라 불렸으며, 1268년 원종과 임연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따라서 마도3호선은 1264∼1268년 무렵 난파된 것이 분명하다. 즉 임시 피난수도인 강도(江都)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 직전 최고 집권층에게 보내는 곡물과 먹을거리들이 배안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목간 가운데 “우삼번별초도령시랑(右三番別抄都領侍郞)”이라는 묵서가 있다. 그동안 삼별초의 지휘관은 7∼8품의 하급 무반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4품의 시랑(侍郞)이 도령(都領)을 맡았고 야별초의 좌별초(左別抄) · 우별초(右別抄)가 각기 3번(番)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몽고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의 실체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마도3호선의 화물로는 볍씨 · 보리 · 밤 등의 곡물과 대나무상자 속에 생선뼈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 다량의 도기 안에는 젓갈류 등이 들어 있는데 목간에 표현된 내용을 보면 상어〔沙魚〕 · 말린 홍합〔乾淡〕 · 생전복〔生鮑〕 · 전복젓갈〔鮑醢〕 · 개고기포〔犭脯〕등이 있다. 이 외에 조약돌 앞뒤에 장군(將軍) · 차(車) · 포(包) · 졸(卒) 등이 적힌 장기돌 47점도 수습되었다.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고단한 항해생활을 달래기 위해 중국에서 들어온 장기를 오락삼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마도해역에서 발굴된 태안선은 청자운반선으로서, 마도1·2·3호선은 곡물운반선으로서 기능했으며, 배 안에 적재된 다양한 유물과 목간 · 죽찰 등을 통해서 당시 생활상과 문화상을 복원할 수 있는 고려의 타임캡슐로서 부각되고 있다. 태안선은 여러 종류의 청자가 다량 발굴됨으로써 고려 청자 제작기법 및 청자의 문양에 관한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마도1·2호선은 최충헌집권기에, 마도3호선은 김준집권기에 난파된 곡물운반선인데, 고려 무인집권기 중앙 지배층의 지방지배와 조세수취가 원활히 이뤄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로서 중요하다. 특히 마도3호선은 고려 선박의 구조뿐만 아니라 무신집권기 삼별초의 편제 · 운영 및 당시 강도 지배층의 식생활 문화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안 마도해역 탐사보고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1)
『태안 마도2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1)
『수중발견신고유물 바닷속 유물, 빛을 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0)
『특별전 도록, 800년전의 타임캡슐』(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0)
『태안 마도 1호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0)
『고려청자보물선 태안 대섬수중발굴조사보고서』(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09)
『특별전 도록, 고려 뱃길로 세금을 걷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09)
『특별전도록, 고려청자보물선』(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08)
「마도 3호선 목간의 현황과 판독」(임경희,『목간과 문자연구』7, 한국목간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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