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구서원 ()

유적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홍재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이칭
이칭
운구서당(雲衢書堂)
정의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홍재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개설

1786년(정조 10)에 고려의 유신 홍재(洪載), 이오(李午), 조열(趙悅)을 향사하기 위해 삼가현(三嘉縣) 두심동(杜心洞)에 건립된 서원이다.

역사적 변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삼가현 두심동으로 내려와 평생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고려의 유신 홍재, 이오, 조열을 향사하기 위해 1786년에 건립하였다. 「운구서원중수기(雲衢書院重修記)」에는 1833년(순조 33)에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뒤, 1923년에 홍재의 후손인 홍승부(洪承富) 등을 중심으로 문중의 뜻을 모아 두심동에 운구서당(雲衢書堂)을 중건하였다. 『경남의 서원』(2008)에 따르면, 운구서원과 인구서원을 같은 곳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추정이다.

내용

홍재는 본관이 풍산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소윤(少尹), 군사(郡事) 등을 역임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과 함께 고려 말 유신으로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구은(九隱)’ 중 한 명이다.

이오는 본관이 재령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은거할 곳을 찾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터를 정하고 거처하면서 함안지역에 대대로 세거하였다. 이오는 모곡에 은거한 데서 호를 ‘모은(茅隱)’이라 하고 고려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해 은거지 주변에 담을 쌓아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표비를 세웠으며, 세상을 뜰 때까지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았다. 운구서원 외에 함안의 인구서원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은선생실기(茅隱先生實記)』가 있다.

조열은 본관이 함안이고, 호는 금은(琴隱)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전서(典書)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고려가 망하자 홍재, 이오 등과 함안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금은실기(琴隱實紀)』가 있다.

서원의 명칭은 고려 멸망 후 서원에 제향된 3인이 모여 서로 위문(慰問)하고 시가(詩歌)를 지어 읊었다는 삼가현의 ‘운구대(雲衢臺)’에서 유래한 것이다. 운구대는 2006년 1월 12일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오가 은거하던 고려동마을에는 현재 30호의 재령이씨 후손들이 단성의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高麗洞壑表碑),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자미단(紫微壇), 자미정(紫微亭)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동유적지(高麗洞遺蹟址)’라는 이름으로 1983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1833년에 운구서원 중수 시에 김면운(金冕運)이 지은 「운구서원중수기」가 『오연집(梧淵集)』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만구집(晩求集)』
『모계집(茅溪集)』
『모은선생실기(茅隱先生實記)』
『성재집(性齋集)』
『오연집(梧淵集)』
『경남의 서원』(구산우 외, 선인, 2008)
『합천군사』(합천군사편찬위원회, 1997)
문화재청(www.cha.go.kr)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
집필자
김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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