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헌종 12)에 장해빈(張海濱, 1547∼1657)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처음에 ‘경화사(景華祠)’라는 사우를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59년 사림들의 중의로 ‘북산서원’으로 승격되어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일에 춘추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장해빈은 절강장씨의 시조이자, 군위 입향조이다. 명나라 항주도 금화부 오강현(烏江縣)에서 태어나 23세 때 정유재란에 조선지원군 장수로 참전한 뒤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군위에 남아 정착하였다. 조정에서 혜민서 참봉과 율봉도 찰방을 제수했으나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 고국을 그리며 뒷산에 대명단을 쌓고 황제 기일에는 서쪽을 향해 절했다고 한다. 사후 1751년(영조 27)에 왕명으로 후손들의 부역이 면제되었으며, 1892년(고종 29)에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동지의금부훈련원사에 증직되고, 부인 의령남씨는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서원에는 강당과 강당 북측에 2개의 사당이 병렬로 위치하고 있다. 작은 사당에는 편액이 없고, 우측의 그보다 큰 사당에는 ‘경화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에는 ‘북산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강당 앞 우측에는 장해빈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장해빈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회화나무가 현존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팔작지붕에 민도리형식이며, 좌우로 한 칸씩 협실을 두고, 정면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경화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맞배지붕에 이익공양식을 취하고 있다. 서측 편에 있는 작은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맞배지붕에 풍판을 설치하였으며 민도리형식이다.
북산서원 관련 기록으로는 전 혜능참봉(前惠陵參奉) 이중철(李中轍)이 지은 「북산서원신도비명(北山書院 神道碑銘)」이 있다. 경화사에 장해빈의 위패를 봉안할 때 이휘령(李彙寧)이 지은 「경화사장공봉안문(景華祠張公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은 『고계집(古溪集)』에 수록되어 있다.
시조이자 입향조를 제향하기 위해 절강장씨들의 집성촌에 건립한 조선 후기 문중서원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동시에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에 정착한 귀화인을 제향한 조선시대 흔치 않은 서원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