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연서원 ()

유적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인천채씨 4현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인천채씨 4현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개설

1795년(정조 19)에 인천채씨 4현을 모신 웅연세덕사로 창건되어 채귀하(蔡貴河), 채수(蔡壽, 1449∼1515), 채소권(蔡紹權, 1480∼1548), 채득기(蔡得沂)를 제향하던 서원이다. 1798년(정조 22)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있다.

내용

채귀하는 자가 청일(淸一), 호는 다의당(多義堂)이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간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조선 초에 태조가 호조판서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다의당선생실기(多義堂先生實記)』가 있다. 채수는 자가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이다. 세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찰사, 한성좌윤,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며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채소권은 채소의 아들로,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옹(拙翁)이다. 150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청주목사,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있을 때는 이현보(李賢輔)와 주세붕(周世鵬), 귀향해서는 황준량(黃俊良)과 친교하였다. 채득기는 자가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 학정(鶴汀)으로 청음 김상헌의 문인이다. 대명처사로 칭해졌으며 사후 집의에 증직되었다. 삼강록, 존주록, 배신록 등에 기재되어 있다.

1798년 세덕사가 웅연서원으로 승격되었을 때 「웅연서원상량문(熊淵書院上梁文)」과 「웅연서원봉안문(尙州熊淵書院奉安文)」 및 상향축문은 정종로(鄭宗魯)가 지었다.

의의와 평가

인천채씨 문중서원으로 조선 후기 문중서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참고문헌

『녹리집(甪里集)』
『다의당선생실기(多義堂先生實記)』
『입재집(立齋集)』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
집필자
김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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