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습(李槢)
1277년(충렬왕 3)에 위득유(韋得儒), 노진의(盧進義), 김복대(金福大) 등이 김방경(金方慶)이 반란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다구(洪茶丘)를 비롯한 부원세력이 개입하여 김방경을 고문하고 유배보낼 때 이분희, 홍다구와 더불어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홍다구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후 김주정(金周鼎), 박구(朴球), 염승익(廉承益)이 여러 차례 이습 형제의 죄를 왕에게 아뢰었고 김심(金深)이 그것이 사실임을 밝혔다. 이습은 내료(內僚)가 사사로이 청탁하면 일체 거절하였으므로 내료들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충렬왕이 귀국하자 김주정 등은 다시 내료를 통해 이습 형제의 죄를 아뢰었다. 결국 김방경무고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것이 빌미가 되어 1278년(충렬왕 4)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조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