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이후 진보(鎭堡)·돈대·성곽·제언(堤堰) 등을 보수하여 완전히 요새로 변한 강화도를 그린 지도이다. 강화도 53개의 돈대(墩臺:조금 높직한 평지) 가운데 가장 늦게 완성된 1725년(영조 1)의 작성돈(鵲城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25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니산과 길상산 사이에 있는 선두언(船頭堰)은 1706년(숙종 32)에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만든 것이고, 그 뒤 1862년(철종 13)에 배수가 더 잘되게 원래부터 있던 양쪽 2개의 갑문(閘門)에다 중앙에 갑문 1개를 증설하였다고 ≪강도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선두언의 갑문이 양쪽 2개로 표시되어 있어서, 1862년 이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내용은 진보·돈대·성곽·제언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수로(水路)·나루터·갑곶 나루와 인접 도서, 그리고 대안(對岸)에 있는 문수산성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등 군사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다. 유수의 명에 의하여 군사·행정적인 목적에서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의 내용을 보면 염하(鹽河)를 건너 육지에서 강화도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염하 연안의 월곶에서 초지까지는 성벽 또는 댐을 쌓았고, 북·서·남쪽 해안에는 돈대를 만들어 거점적인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 읍지에 첨부된 지도에서 흔히 보는 것과 같이 읍치, 즉 강화성의 지도는 특별히 대축척으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동서남북의 4대문과 북장대·남장대, 그리고 관아·영(營)·창(倉) 등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도로와 수로는 주황색으로 나타내었다. 과거의 해안선과 만입(灣入)·하계망이 자세히 그려져 있으므로 해안선의 변화, 제언과 간척 사업 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이 밖에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개인소장본 등 비교적 많이 전해지고 있으며, 작성 연대도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