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金正浩)의 목판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부분적으로 보완한 채색 필사본. 제작과 연대는 미상이나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1861년(철종 12)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여지도」와 비교해 보면, 「대동여지도」의 도성도에서는 경복궁 북쪽의 경무대(景武臺)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대동방여전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현재의 청와대 자리는 고려 시대에는 이궁(離宮)터였고, 조선 시대에는 연무장(鍊武場)·융무당(隆武堂) 자리였으며 경무대라고도 부른 듯하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서는 독립문 남쪽에 있던 석교(石橋)를 혁교(革橋)로 표시하고 있으나, 『대동방여전도』에서는 석교로 표시하고 있다.
봉수(烽燧) 표시를 보면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것이 「대동방여전도」에서는 누락된 것을 함경도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대동여지도」에서 사용한 산맥 표시 방법인 이른바 산악 투영법을 쓰지 않고, 영조 시대의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지도」에서와 같이 연속되는 산을 그려 산맥을 표시하고, 그 위에 연한 녹색을 당채로 칠하여 지도를 화려하게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22첩으로 되어 있으나, 이 지도는 21첩과 22첩을 같은 첩에 합침으로써 21첩으로 만들었다. 즉, 추자도 부분과 제주도를 편의상 합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를 120리 간격으로 남북을 22층으로 나누어 동서 방향의 대상지도(帶狀地圖)를 만든 점에서는 「대동여지도」와 다를 바가 없다.
또한, 「대동여지도」의 지도유설(地圖類說), 지도의 범례에 해당하는 지도표(地圖標), 각 도별로 주현(州縣)·대소영(大小營)·진보(鎭堡)·산성·봉수·역참(驛站)·방면(坊面)·전부(田賦)·민호·인구·군총(軍總)·목장·창고·곡총(穀總) 등의 표를 그대로 싣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으며, 「동여도 東輿圖」와 같은 유형의 필사본과 개인 소장의 비슷한 사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