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교동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섬이다.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이라고 불렀다. 고도가 매우 낮은 섬으로 100m 이하의 봉황산·율두산·고양이산·수정산 등이 있다. 연안의 낮은 지대는 갯벌로 되어 있고 간조와 만조의 차이도 커서 항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육지와 격리된 섬이기 때문에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고려 희종이 유배되었을 때 기거하던 경원전과 조선 철종의 잠저소 등이 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강화도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섬.
개설
명칭 유래
자연환경
연백에 면한 동북해안은 제방을 쌓아 고구(古龜)의 관개용 저수지의 완성으로 경지확장 및 경지정리를 하였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연안의 저지(低地)는 이질(泥質)인 갯벌로 되어 있어서 어항의 발달은 불리하고, 간만의 차도 커서 선박의 출입도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섬인 까닭에 한서의 차는 내륙에 비하여 작으나 언제나 해풍이 비교적 강하게 불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으로 한기를 더욱더 조장한다.
내륙에 비하면 겨울이 빠르고 여름이 늦어 환절기에는 해상의 기류가 고르지 않아 때때로 소나기 · 회오리바람을 몰아오며, 때로는 서리나 우박이 내리는 등 날씨가 고르지 못하다. 연평균기온은 11.2℃, 연강수량은 1,390㎜이다.
상고시대에 이 섬은 개화산 · 율두산 · 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며, 교동평야에는 언제나 조수가 흘렀고, 그것이 그 뒤 하나의 섬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개화산 중턱에서 볼 수 있는 화석이 된 조개껍질이나 현 해안선에서 내륙에 위치한 패총의 흔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남쪽에 있는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화(陸化)되어 인마가 내왕할 수 있었다가, 1578년(선조 14)경 다시 바다로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인마가 내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후빙기 이후 범세계적인 해면변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하천의 발달도 드물고, 작은 계류가 있을 뿐이다.
형성 및 변천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 · 황해 · 충청의 주사(舟師)를 통괄하게 하였다. 1777년(정조 1)에 이르러 교동부사를 격을 낮추어 현감으로 하였다가, 1779년에 통어사가 강화로 이속되면서 교동현감은 다시 부사 겸 방어사로 승격되었다. 1789년에 통어영(統禦營)이 다시 교동으로 옮겨왔다.
1866년(고종 3) 통어사가 다시 강화로 이속되면서 부사 겸 방어사로 변경되었다가, 같은 해 8월 또다시 통어사를 두었다.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어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내려갔다. 1895년 행정개편에 따라 읍을 폐하여 강화에 이속하였다가 1896년 읍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강화군에 속하게 되면서, 개화 · 수정의 두 면을 두었다가 1934년 두 면이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현황
2006년 현재 교동면 전체 면적은 47.14㎢이고 논 25.89㎢, 밭 2.57㎡, 임야 11.45㎢이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교동토의 간척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써 형성된 저평한 평야가 넓고, 완비된 경지정리 · 수리시설 기계화 등으로 쌀의 생산량은 섬의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방으로 나가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 감자 등과 임산물은 밤 · 대추 · 버섯 등이 생산된다.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농가의 부업으로, 완초공예품은 강화도의 화문석처럼 그 이름이 높다. 완초공예품으로는 화방석 · 꽃삼합 · 광주리 · 손가방 · 화문석 등 다양하며, 그 가운데 화방석과 꽃삼합은 대도시로 팔려나가는데, 수익성이 높아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6 · 25전쟁 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있어 육지와 서해도서가 자유롭게 연락되었으나, 전쟁 이후 매우 불편해졌다. 그러나 서울과의 연결은 강화도 창후리에서 수시로 배가 있었고, 연안도서를 연락하는 선편이 있었으나 불편한 편이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강화도와 연결되었고,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지리적 위치상 외세의 침범이 빈번했던 관계로 섬에는 많은 고적이 남아 있다.
1629년에 축조된 읍성지(邑城址), 1173년경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화개산성지, 교동구현허(喬桐舊縣墟)를 비롯하여, 고려 희종이 유배되어 기거하던 경원전(慶源殿)과 철종잠저소(哲宗潛邸所) · 봉수대(烽燧臺) · 단묘(壇廟) 등과 그 밖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다. 또, 명승지로는 교동팔경이 있고, 화개사 · 교동향교 등은 화개산 남쪽에 있다.
오염원과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이름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47회 인천광역시 강화군통계연보』(강화군, 2007)
- 『인천의 섬』(김종혁 외,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4)
- 『한국도서백서』(전라남도, 1996)
- 『도서지』(내무부, 1985)
- 『교동지』(교동48상록회, 1976)
- 「주민등록현황」(강화군, 2009)
- 「강화 교동도의 해안저습지 개간과 수리시설」(최영준·홍금수, 『대한지리학회지』38·4, 2003)
- 강화군청(http://www.ganghwa.incheon.kr/open_content/main/)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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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있는 산. 연봉 정상에 고려 시대의 봉수대 석축이 남아 있다. 높이는 259미터.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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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조선 시대에, 경기ㆍ충청ㆍ황해 세 도의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일을 맡아보던 무관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경기의 수군절도사가 겸하였으며 인조 11년(1633)에 설치하였다가 고종 30년(1893)에 없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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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조선 시대 친군영의 하나. 경기ㆍ황해ㆍ충청 3도의 수군을 통할하던 군영으로, 고종 21년(1884)에 설치하였으며 뒤에 친군영에 속한 우영ㆍ후영과 합하여 통위영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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