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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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석 꽃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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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
내용 요약

화문석은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이다. 여름철에 화문석 위에 눕거나 앉으면 더위를 덜 수 있고 무늬도 아름다워 애용되었다. 신라 시대에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고려에 들어서는 화문석이 외국에 알려지며 중요한 수출품과 선사품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화문석의 수요가 급증하였으며 특히 외국인의 애호가 높았다. 화문석의 형태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며 무늬는 용이나 꽃 모양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초보자는 2년쯤 배우면 화문석을 짜는 기술을 익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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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
내용

왕골은 재배가 손쉽고 이를 매는 일도 까다롭지 않아서 이것이 자라는 곳에서는 거의 누구나 짤 수 있다. 그리고 겉이 매끄럽고 기름져서 물이 잘 스미지 않고 매우 부드럽다.

여름철에 화문석을 마루에 깔고 그 위에 눕거나 앉으면 더위를 덜 수 있어서 널리 애용되었으며 무늬 또한 아름다워 집 치장에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더구나 좌식생활(坐式生活)을 하여왔던 우리에게 화문석은 빼놓을 수 없는 살림살이의 하나였으며, 이것이 일찍부터 중요 공산품으로 손꼽혀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시대에 이미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 있었다.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에 석전(席典)으로 불리던 부서가 경덕왕 때 봉좌국(奉坐局)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다시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두 가지 이름으로 미루어, 이들이 자리류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관청이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리류의 생산을 국가기관에서 담당하여야 할 만큼 이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같은 책에 육두품(六頭品) 이하의 벼슬아치도 수레 앞뒤에 휘장 삼아 ‘완석(莞席)’을 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을 화문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에 들어와 화문석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 내지 선사품이 되었다. 고려 초에 요나라에 보낸 특산품 가운데 용무늬를 넣은 화문석(龍鬚草地席)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화문석을 매우 탐내었다고 한다.

북송(北宋)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는 극찬을 늘어놓았다.

화문석의 수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급증하였으며, 특히 외국인의 애호열은 더욱 높아졌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한 번의 동지사행(冬至使行)중국에 보낸 화문석이 124장에 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오는 관리들에게도 적지 않은 양을 선사하였다. 화문석의 조달을 담당한 기관은 장흥고(長興庫)로서, 이곳에서는 각 지방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들였다.

화문석은 예로 부터 용수초지석 · 오채용문석(五彩龍紋席) · 용문염석(龍紋簾席) ·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 만화석(滿花席) · 각색세화석(各色細花席) · 채화석(彩花席) · 잡채화석(雜彩花席) · 황화석(黃花席) · 화석(花席)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용수초지석이라는 이름은 왕골이 용의 수염처럼 생긴 데에서 왔다.

그리고 오채용문석 · 용문염석 · 오조용석은 용모양의 무늬를 넣어 짠 데서 왔다. 오채용문석은 다섯 가지 색으로 짠 용무늬 꽃자리이고, 오조용문석은 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무늬 꽃자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은 극상품이어서 앞에서 말한 대로 왕실에서 중국에 보내는 선물용으로 생산되었다. 용문염석은 용무늬 발로서 역시 궁중에서 썼으리라고 짐작된다.

조선에서는 왕골 생산지로 안동예안을 손꼽았다. 『임원경제지』에 인용된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는 “영남의 안동 예안 사람들이 오채용문석을 잘 만들어 공물로 바친다. 서울의 지체 높은 가정이나 사랑에서는 해서 · 배천 · 연안의 것을 제일로 쳤으며, 경기 교동(喬桐) 것은 버금간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강화도 화문석은 근래에 널리 알려진 듯하다. 왕골은 사초과에 딸린 일년생풀로서 줄기는 세모꼴이며 줄기 꼭지에서 꽃이 나와서 잔 꽃이 핀다. 4월 중순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5㎝쯤 자라면 5월 초순에 옮겨 심었다가 8월 상순부터 9월 사이에 거두며 길이는 1.5∼2m에 이른다.

줄기의 섬유 조직은 매끄러우며 윤택이 나는데 다 자라면 누른빛으로 변한다. 거두어들인 왕골은 줄기의 각에 찬이슬을 맞혀가며 3∼4일 동안 바짝 말린다. 이렇게 하여야 빛이 하얗게 바래서 윤기가 난다.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로서(길이 30∼50㎝)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낸다.

겉껍질이라야 염료가 적게 들고 물감이 곱게 먹는다. 물든 왕골은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물감으로는 회색 · 검은색 · 붉은색 · 누른색 · 진황색 · 자색 · 남색 · 녹두색 · 반물 등 아홉 가지를 쓴다. 왕골은 자리틀에 올리기 전에 물에 적셔둔다. 물기가 있으면 부드러워서 매기 쉬운 반면 마른 것은 갈라지거나 부서지며 잘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화문석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짜게 마련이어서 형태상의 변화는 거의 없으며 다만 무늬에 다양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것을 매는 사람 수는 너비에 따라 달라서 석 자에서 다섯 자 크기에는 두 사람, 여섯 자에서 일곱 자 크기에는 세 사람, 여덟 자에서 아홉 자 크기에는 네 사람, 열 자에서 열두 자 크기에는 여섯 사람이 한 동아리가 된다.

세 사람이 너비 예닐곱 자의 화문석 한 장을 짜는 데에는 닷새쯤 걸린다. 초보자는 2년쯤 배우면 기술을 익힐 수 있다. 흔히 화문석과 등메를 혼동하나 등메는 한올씩 가마니 치듯 바디로 다져서 짜며 무늬도 물들인 골로 수놓듯 짜는 것이다. 재료 또한 달라서 등메에 드는 참골은 줄기가 둥글고 가늘다. 예로부터 화문석보다 등메를 윗길로 쳤다.

참고문헌

『인간문화재』(이용해, 어문각, 1963)
『한국민속대관』 5(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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