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니는 1900년대 초에 일본에서 들어왔으며, ‘가마니’라는 이름도 일본말 ‘가마스(かます)’에서 비롯되었다. 1909년 조선통감부 『제3차 한국시정연보(韓國施政年報)』에 따르면, 1908년에 새끼틀 19대, 보통 가마니틀〔普通製筵器〕 495대, 마키노식 가마니틀[眞野式製筵器] 50대가 일본에서 들어왔다. 이후 가마니틀 수입량이 대폭 증가하여 1916년에는 70,916대, 그 이듬해에는 12,244대에 이르렀다.
가마니가 들어오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섬을 썼으나, 섬은 날 사이가 성기어서 낱알이 작거나 도정(搗精)된 곡물은 담지 못하고 오직 벼 · 보리 · 콩 등만 담았다. 가마니에 비해 담을 수 있는 양은 많으나, 그만큼 무거워서 한 사람이 들어 옮기기도 어려웠다. 그에 비하여 가마니는 한 사람이 나르기에 적당하고 높이 쌓기에 편리하며 날과 날 사이가 잘 다져져서 어떤 곡물도 담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빈 가마니는 차곡차곡 재어놓기도 좋으며, 더욱이 반으로 접을 수 있어 보관에도 편리하였다.
가마니는 1970년대 말까지 정부에서 매입하였으며, 농가에서는 농한기에 부업삼아 이를 많이 짰다. 기계를 이용하므로 두 사람이 하루 20장까지 짤 수 있다. 가마니는 사용 용도에 따라 비료가마 · 볏가마 · 쌀가마로 나누며, 날 수도 각기 달라서 비료가마는 17날, 볏가마는 20날, 쌀가마는 22날로 짰는데, 날 수가 많을수록 든든하다. 크기도 조금씩 달라서 비료가마의 너비는 75.75㎝(2자 반)이나 나머지 두 종류는 84.84㎝(2자 8치)였다. 근래에 마대 · 비닐포대 · 종이부대 등이 대량 생산됨에 따라 정부에 의한 가마니 매입이 중지되고, 한편으로는 벼의 다수확 품종 보급으로 인해 짚 자체도 새끼나 가마니용으로는 부적합하여 가마니 생산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