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성(半月城)의 바로 북쪽에 있으며, 천마총(天馬塚)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다. 현재 10여 기의 대소 고분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내물왕릉(奈勿王陵)이라 전하는 고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 곳 고분들은 경주 평지고분군(平地古墳群) 중 황남동(皇南洞)이나 노동동(路東洞)·노서동(路西洞) 일대에 흩어져 있는 대형고분들보다는 비교적 규모가 작고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부터 차차 북쪽으로 고분 축조지를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몇몇 고분이 발굴되었고, 1973년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일부가 조사된 바 있다. 구조형식은 경주고분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불리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되며, 1970년대 초 도굴된 한 고분에서 간단한 형식의 소형금관(5세기 추정)이 출토된 바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관은 신라의 금관중 가장 형태가 단순하며 오래된 것으로, 금판을 길죽한 띠모양으로 오려 관테를 만든 다음 별도로 만든 3개의 솟음장식을 관테의 안쪽에 덧대고 금못을 박아 고정하였다. 관테에는 상하로 2줄의 달개를, 솟음장식에는 한 줄씩의 둥근 달개를 금실에 꿰어 매달았다. 솟음장식은 중심줄기와 2개의 가지로 이루어진 나뭇가지모양인데 형태상으로 보면 부산 복천동 10·11호분에서 나온 금동관과 유사하며 신라의 전형적인 관(冠)인 ‘출(出)’모양 금관의 시원적인 모습으로 추정된다. 관테의 지름이 14cm에 불과하여 금령총 출토 금관처럼 소년용일 가능성도 있다.
한편 내물왕릉이라 추정되는 고분은 교동 14번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봉분의 밑면 주변에 자연석의 한 모서리가 노출되어 있다. 이는 무열왕릉(武烈王陵)의 경우와 같이 그 안에 별도의 호석(護石)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삼국유사』에 내물왕릉이 첨성대(瞻星臺)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현재의 위치와 일치하며 초기의 왕릉으로서는 비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