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첨성대 중 대표적인 것은 신라시대 경주에 있었던 것이다. 별을 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曆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하여 별이나 일월오성(日月五星:해와 달 그리고 지구에서 가까운 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의 다섯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전자는 미신적인 점성학이고, 후자는 과학적인 천문학 또는 역학(曆學)이다. 이 두 가지 관측의 비중은 시대가 지날수록 후자 쪽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의 첨성대도 점성학적인 비중이 컸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1) 고구려
고구려의 첨성대에 대하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廟)와 9지(池)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里)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첨성대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2) 신 라
신라의 첨성대는 경주에 실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상방하원(上方下圓: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며, 높이는 19척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존 실물과 일치한다.
이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 뒤에 일본에서 점성대를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경주의 첨성대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3) 백 제
백제의 첨성대에 대해서는 문헌의 기록도 없고 건축물이 있었던 터도 없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과 천문역법을 교류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 ≪일본서기≫에 나타난 첨성대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4) 고 려
고려의 첨성대에 대한 기록도 별로 없다. 그러나 강화도마니산(摩尼山) 정상의 참성단(塹星壇)의 기록과 터, 그리고 개성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첨성대라고 구전(口傳)되는 석조물이 전해오고 있다.
여러 지리지에 따르면, 참성단은 돌을 쌓아서 만든 것으로 높이가 10척 상방하원이며, 위의 사면(四面)이 각각 6척6촌, 아래의 원 너비(지름)가 각각 15척이다.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으로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어서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承旨)을 보내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점성과 제천(祭天)의 관계, 참성단과 경주 첨성대의 상방하원의 형태상의 비슷함과 명칭이 소리가 서로 비슷한 것, 그리고 그 뒤 조선시대에 마니산 산정에서 천문관측을 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고려가 몽고의 침공을 받았던 강화도에 도읍이 있었던 때의 첨성단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가는 곳이다.
만월대의 첨성대는 높이 3m 가량의 다섯 개의 돌기둥으로 받친 석대(石臺)로서 위의 평면넓이가 대략 3m×3m로 9㎡이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7년(1281) 원나라에서 수시력(授時曆: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달력)이 들어 왔는데, 왕은 태사원(太史院)에 명하여 영대(靈臺:임금이 기상을 보는 대)와 천문기기(天文器機:觀象)를 만들어서 일월(日月)을 관측하여 도수(度數:각도나 광도 등의 크기)가 맞는가를 자세하게 참고하고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때부터 그 영대 위에 측기(測器)를 놓고 천문관측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만월대의 첨성대가 설령 이 밖의 기록은 없다 해도 위의 기록과 같은 관측에 사용되었던 관천대(觀天臺)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5) 조 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 초부터 고려의 서운관(太卜監과 太史局을 합친 것)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1420년(세종 2)에는 첨성대를 세우고, 그 뒤에 다시 경복궁 안의 서운관을 확충하여 간의(簡儀:장영실과 이천 등이 만든 관측기)를 비롯한 천문기기를 10여 종이나 만들어서 설치하고 관측하였다. 그 중 간의를 올려놓은 간의대(簡儀臺)는 돌로 쌓은 것으로 높이가 31척, 길이가 47척, 너비가 32척이었다.
이 관상감(서운관의 바뀐 명칭)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더불어 불타 없어지자, 1688년(숙종 14) 남구만(南九萬)이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터를 잡아 관상감을 재건하였다. 이것이 곧 창덕궁 금호문(金虎門:지금의 현대건설 자리) 밖에 있는 높이 3.5m, 넓이 2.4m×2.5m인 관천대(觀天臺)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대 위에는 높이 1m의 네모진 돌이 있는데 관측할 때에 소간의를 설치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대를 일명 소간의대(小簡儀臺)라 하고 속명(俗名)으로는 첨성대라고 한다고 ≪서운관지 書雲觀志≫에 적혀 있다. 이 관천대와 비슷한 것이 현재 창경궁 안에도 남아 있는데 높이 3m, 넓이 2.9m×2.3m이며, 역시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네모진 돌이 놓여 있다. 그러나 제작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715년(숙종 41) 또 하나의 관상감을 경희궁 개양문(開陽門) 밖에 만들었는데, 거기도 관천대가 있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다만 <도성도 都城圖>에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상에서 우리 나라 첨성대의 변천에 관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첨성대는 처음에는 점성대라고도 불려서 다분히 점성적이었던 것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영대라고도 하였다가 다시 관천대, 즉 더 정확하게는 간의대·소간의대라고 하는 과학적인 명칭으로 변하여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로부터의 습성에 따라 후세에까지 여전히 첨성대라고 불렸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