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 뒤에 군산 앞바다의 고군산도(古群山島)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1597년(선조 30) 10월 29일에 이곳 고하도(高下島)로 진을 옮겼다. 고하도는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조그만 섬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羅州牧)에 속했으며, 비문에는 고화도(高和島),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보화도(寶花島)라고 표기하였다.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영산강의 내륙 수로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이 섬의 지형은 서북쪽이 병풍처럼 높이 솟아 있어 겨울에 북서풍을 막아줄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배를 감추기에도 적합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수군 재건에 필수적인 전선 건조와 군량 모집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지리적 위치가 서해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남해에서의 해상 활동에 적절하지 못한 약점이 있었다. 또한 섬이 작아 곡물 생산이 적었고, 유입된 백성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완도(莞島) 동북쪽에 위치한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겼다. 주둔 기간은 총 108일간이었다.
고금도진으로 옮겨간 이후 고하도진에는 별장(別將)이 배치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고하도진마저 당곶(唐串, 현재 전라남도 목포시 하당 일대)으로 옮겨감에 따라 폐진되었다. 선착장에서 약 200m 떨어진 당산에 1722년(경종 2)에 세운 유허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