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자국의 의사를 상대국에 강요하기 위하여 국가 간 또는 이에 준하는 집단 간에 수행되는 조직적인 투쟁을 가리키는 정치용어이다. 국제법에서는 민족해방전쟁과 한 국가 내 2개 이상 정치적 권력집단 간의 무력투쟁도 전쟁에 포함시킨다. 현대의 전쟁은 군사적 무력만이 아니라, 비군사적 측면인 정치·외교·경제·심리·사상·과학기술 등도 전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전쟁과 정치의 구별이 어렵다. 우리는 고조선시대부터 크고 작은 전쟁을 겪어왔는데 삼국시대의 분쟁과 한국전쟁을 제외하면 모두가 외세의 침략에 맞선 전쟁이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1) 개념 및 정의
최근의 국제법에서는 식민지 지배 및 외국의 점령, 인종차별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이른바 ‘민족해방전쟁’과 한 국가에서 2개 이상의 정치적 권력집단간의 무력투쟁도 전쟁에 포함시키고 있다.
전쟁은 군사적 측면의 무력투쟁뿐만 아니라, 비군사적 측면인 정치 · 외교 · 경제 · 심리 · 사상 및 과학기술 등도 무력수단과 마찬가지로 전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은 정치적 권력집단 사이에서 조직적인 정치 · 경제 · 사상 및 군사력 등을 사용하여 자기의 의사를 상대편에게 강요하는 투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개념과 정의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그 견해를 달리하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 전쟁은 국가의 존망과 생사의 문제이다.
② 패자는 승자의 의지 앞에 굴욕적인 굴복을 당한다.
③ 전쟁은 약속이나 계약에 의해서 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 의하여 시작된다.
④ 민족이나 국가 사이의 분쟁은 조정기관에 의해서 해결된 일은 거의 없었고, 유일한 해결수단으로 전쟁을 구사해 왔다.
⑤ 전쟁은 지금까지 인류 생존의 기본 요소가 되어 왔고, 또 인간의 천성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양상을 달리하면서 계속 존재한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독립과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쟁을 이해하고 연구하여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론적 근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2) 원인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단일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나, 조미니(Jomini,B.D.)는 정부가 전쟁을 하는 원인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① 권리의 회복 및 보호, ② 주요 국가 이익의 보호 및 유지, ③ 세력 균형의 유지, ④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념의 전파 · 말살 또는 보호, ⑤ 영토의 획득에 의한 국가의 영향력 및 세력의 증대, ⑥ 정복욕의 충족이다.
전쟁은 반드시 원인과 동기에 의해서 발발한다. 원인은 예외 없이 장기간에 걸쳐 전쟁 결의와는 별도로 교전국 쌍방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동기는 많은 경우 미묘하고 교활하게 하여 개전 책임을 상대편에 전가시키기 위해 감추어서 식별하기 어렵지만, 한 편이 먼저 침공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3) 전쟁의 유형
전쟁의 유형은 전쟁의 어떤 특성을 분류의 기초로 삼느냐에 의해서 달라지게 된다. 도덕적 기준에 의하면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으로 구분되고, 전략이 공세적인가 수세적인가, 그리고 공격의 선후에 따라 침략전쟁과 자위전쟁으로 구분된다.
전쟁의 목적과 동기의 기준에 의하면, 침략전쟁 · 자위전쟁 · 제재전쟁(또는 응징전쟁) · 식민지전쟁 · 민족해방전쟁 · 독립전쟁 · 혁명전쟁 등이 있다. 지역적 규모의 기준에서는 세계전쟁 · 국지전쟁으로 구분된다.
전쟁 양상의 기준에서는 무제한전쟁(또는 전면전쟁 · 절대전쟁)과 제한전쟁, 사용 병기의 종류에 따라 핵전쟁과 비핵전쟁(또는 재래식 전쟁), 그리고 선전포고에 의한 정규 군대간에 수행되는 정규 전쟁과 그렇지 않은 비정규 전쟁이 있다.
전쟁의 주체에 따라서는 국가 대 국가 간에 수행되는 국제전쟁과 한 국가 내의 정치권력집단간에 수행되는 내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복합되어 하나의 전쟁형태를 이룬다. 예를 들면, 6 · 25전쟁은 북한측에서 말하면 민족해방전쟁이고, 한국측에서 본다면 침략에 대한 자위전쟁이며, 유엔에 의한 제재전쟁이고, 또한 국지 · 제한 · 재래식 전쟁이었다.
(4) 현대의 전쟁
현대 전쟁의 특징은 정치와 군사가 밀접하게 융합되어 있으며,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클라우제비츠(Clausewitz,K.)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전쟁이라는 것이다.
첫째, 전면전쟁에서는 교전국간의 외교관계는 단절되고 군사적 행동만 전개되나, 제한전쟁에서는 전쟁중에도 어떤 형태로든 외교 교섭이 유지된다.
즉, 전쟁과 정치의 구별이 어려워져 정치가는 군사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군인은 군사문제에 대한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예지도 갖추어야 한다.
둘째, 현대 전쟁은 다만 이익이나 세력의 확장이 아니다. 예컨대,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처럼 체제의 투쟁, 이데올로기의 투쟁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19세기까지의 전쟁이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 획득을 지향한 데 반하여, 현대 전쟁은 희생은 불문에 붙이고 상대국의 무조건 항복 혹은 그 나라를 지탱하는 체제나 이데올로기를 말살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적대국가의 도의적 · 가치적 · 체제적 열등성을 강조하는 반면, 성전(聖戰) · 자위전 · 해방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신의 전쟁의 정당성 · 도덕성을 강조한다. 여기에 현대 전쟁에서의 심리전쟁 · 선전전쟁 · 이데올로기전쟁이 갖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셋째, 현대 전쟁은 물량전쟁이다. 이것은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은 이런 경향을 잘 예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병력 수의 증가에 따르는 군비의 증가뿐 아니라 무기와 장비의 정교화와 기계화에서 오는 군사비의 증가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17일간의 전쟁에서 소비한 전쟁 비용은 4조 2750억 원이나 되었다고 하니, 전쟁을 해서 물질적 이득을 획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과 중국 등이며, 그들이라 할지라도 통로 · 기지 및 자원의 협력 등 다른 국가의 지지 없이는 효과적인 군사행동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1) 통일신라 이전의 전쟁
①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서기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왕검성에 도읍한 위만(衛滿)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 이르러서는 군사력이 증강되고 국토가 넓어졌으며, 고조선 남부에 있는 변한 등의 세력이 한나라와의 직접 통교를 방해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토확장정책을 추진하던 한나라와 대립하게 되었다.
한무제는 서기전 109년 초 사자를 보내어 우거왕에게 한나라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우거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한무제는 그 해 가을 성기(成己)로 하여금 육군 5만 명, 수군 7,000명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조선군의 선전으로 1차 공격에 실패한 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어 강화를 교섭하고자 하였다. 우거왕도 강화교섭에 응하여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기로 하였다.
태자가 1만여 무장병의 호위하에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한나라의 사자는 호위병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태자는 강을 건넌 뒤 자기를 살해하려는 기만책으로 의심하여 돌아와 버렸다. 이로써 양국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화의에 실패하자 한무제는 총 공세를 취하여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한군이 왕검성을 포위하여 수 개월 공격했으나 고조선군은 그때마다 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성 안에서도 화전(和戰) 양파의 대립에 따른 동요가 일어나,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군에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서기전 108년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② 여수 · 당전쟁(麗隋唐戰爭):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요하(遼河)를 국경으로 하여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나라의 대고구려정책은 건국 초기에 아직 정비되지 않은 통치력으로 인한 일시적인 방책이었으며, 점차 요동(遼東)을 정복할 야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수나라의 정책에 대응하여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영양왕 9) 요서(遼西)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전략상의 요충지를 선점하여 수나라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일종의 예방전쟁이었으며, 고구려의 요서 공격에 대응하여 수문제는 수륙군 30만여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육상군은 홍수로 인한 보급선 마비와 질병의 유행으로 요하에 도달하지도 못했으며,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군도 풍랑으로 회군하여 실패로 끝났다.
수나라는 대규모의 군대를 다시 파견하기에는 국내 체제와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고, 예방전쟁의 목적을 일단 달성한 고구려도 전쟁을 더 원하지 않아 수나라는 고구려의 사과를 명분으로 내세워 전쟁을 중지하고 양국의 우호관계는 다시 이루어졌다.
그 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고구려 국왕의 내조를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였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결의하고 612년(영영왕 23)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이때 육상군은 113만이었고, 군량 수송을 담당한 인원은 그 갑절이었으며, 수군은 약 7만 명에 달하였다.
수나라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요동성을 고수하여 수나라의 군대를 수 개월 동안 그곳에서 막아냈다. 요동전투가 전개되는 동안 수나라의 수군은 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거슬러 그 해 6월 평양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수군은 열세하여 해전을 피하고 적의 수군을 지상으로 유도해서 섬멸하기로 하고, 거짓 패한 척 후퇴하여 평양성의 외성 내에 잠복 대기중이던 정예부대가 수군을 급습하였다. 이에 수나라 수군은 불과 수천 명만이 생명을 건져 철수하였다.
요동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초조해진 수양제는 요동지방의 고구려성을 계속 포위하여 고구려군을 가두어 두고, 30만의 별동부대를 이끌고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항해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 유도작전을 전개하여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밖 30리까지 유인한 다음, 수나라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조롱의 시 한 수를 보내고 그에게 철군하면 고구려 왕이 수양제에게 조례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평양성 수비가 견고한 데다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와 식량의 부족으로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구려 왕의 조례 약속을 명분으로 후퇴하였다.
을지문덕은 후퇴하던 수나라 군대에게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때 목숨을 건져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사상 길이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그 뒤 수양제는 613 · 614년, 그리고 617년 세 차례나 침입했으나 거듭 패하고, 전쟁으로 인한 국력 탕진과 민심이 돌아선 데 따른 국내의 반란으로 수나라는 615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침공의 징조를 보이자 고구려는 이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4)부터 요하의 국경선에 1,000여 리의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646년( 보장왕 5)에 이를 완성하였다.
당시 장성 축조공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수상)가 되어, 신라가 한강을 점유함으로써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고구려 · 백제의 동맹에 대응하여 신라는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전개해서 두 나라의 견제를 요청하였다. 이것은 당나라의 대외정책과 일치하여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거듭 권고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사신을 감금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644년 10여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이세적(李世勣)은 6만의 대군으로 요동성 방면으로, 장량(張亮)은 4만 3000여 수군으로 해로를 통하여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신성 · 건안성 · 안시성 등 요동의 요새를 굳게 지켰다. 특히, 안시성에서의 방어전은 치열하여 60여 일간의 교전 끝에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안시성 공격에서 대패한 당나라 군대는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총퇴각하고 말았다. 육상군의 패보를 들은 수군도 침공을 중단하고 회군하였다.
당태종은 그 뒤에도 647 · 648 · 655년에 거듭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구려와 수 · 당과의 싸움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일대 결전이었으며, 고구려 정복의 어려움을 깨달은 당나라는 그 뒤 신라와의 연합을 통한 대고구려정책을 전개하였다.
③ 나당전쟁(羅唐戰爭):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무열왕 7)과 668년( 문무왕 8)에 백제 ·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의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린 것이었고, 당나라는 한반도를 정복할 야심에서 신라와 연합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를 차지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는 한편,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이 진압된 뒤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扶餘隆)을 웅진도독에 임명하여 백제의 옛 땅을 관할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신라의 문무왕과 화친을 맹약하게 함으로써 신라의 백제 병합을 막는 일석이조의 정복정책을 추진하였다.
당나라의 3국 지배 야욕은 고구려 멸망 후에 더욱 노골화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도 9도독부를 설치했는데, 특히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를 도독으로 삼았다.
이 안동도호부는 실제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의 5도독부와 신라까지도 총괄했으며, 이로써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패전국인 고구려나 백제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신라는 이러한 당나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고구려 옛 땅 안에 있는 당나라군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먼저 고구려 멸망 후 요동지방을 비롯하여 당나라 군대가 점령하지 않은 지역의 고구려군 유민이 부흥운동을 전개할 때 이들을 지원하여 고구려 옛 땅에 있는 당나라군을 견제하는 한편, 670년 7월부터 당나라의 백제 주둔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80여 성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671년에는 사비성(泗沘城: 부여) 및 웅진성(熊津城: 공주) 방면으로 진격, 이를 점령하여 백제의 옛 땅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당나라는 그들의 세력이 백제의 옛 땅에서 축출당하자, 672년에 4만 명의 병력을 평양에 진주시켜 신라의 북변 일대를 파상적으로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674년 2월부터 신라 북변에 대하여 총공격을 가하였다. 당나라 대군이 공격해 오자 신라의 북변 성주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당나라군과 치른 전후 18회의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677년 당나라는 신라군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반도 내에 있는 고구려 옛 땅의 주둔군을 요동으로 철수시키는 동시에,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도 요동의 신성(新城: 무순 부근)으로 옮겼다. 이로써 신라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 고려시대의 전쟁
① 고려와 거란의 전쟁: 중국의 송나라는 거란이 점령하고 있는 화북(華北)지방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985년( 성종 4)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또 거란도 986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제의해 왔으나 고려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중립을 지켰다.
거란은 고려와 송나라가 연합하자 불안을 느끼고 993년 10월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80만의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그 후 거란군은 고려군을 물리치고 청천강에 도달하여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고구려의 옛 땅을 넘겨주고 송나라와 단교하여 거란을 상국으로 받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려조정에서는 의논이 많았으나 서희(徐熙)의 외교활동으로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즉, 서희는 소손녕의 거란군을 스스로 물러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 동쪽의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려는 여전히 친송정책을 추구했으므로 거란은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거란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자, 1010년( 현종 1) 11월 거란의 성종은 강조(康兆)의 현종 옹립을 구실로 40만 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제2차로 고려를 침공해 왔다.
고려는 강조에게 30만의 병력으로 통주에서 저항하게 했으나 패하였다. 결국 현종은 12월에 나주로 피난했으며, 1011년 1월 거란군은 개경(지금의 개성)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현종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어 강화를 맺게 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국왕의 무조건 친조(親朝: 친히 조공을 바침)를 조건으로 대군을 철퇴시켰다.
거란은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해 왔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1018년에 거란장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대군으로 고려에 제3차 침입을 해왔다.
고려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을 도원수로 삼아 20만여 명의 대군을 지휘하여 안주로 나아가 대비하게 했으나, 거란군은 바로 개경을 향해 남진하여 다음해 정월에는 개경 100리 거리에 이르렀다.
이때 강감찬이 개경에 대한 병력을 증강하고 거란군을 요격하니, 소배압은 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적을 귀주(구주)에서 대파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구주대첩)이다. 그 결과 1019년에 강화를 맺어 양국은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② 고려의 여진정벌: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만주 북부 완안부(完顔部)의 여진은 세력이 강대해지자 함흥평야의 패권을 두고 고려와 정면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1104년(숙종 9) 1월 완안부의 기병이 정평의 장성 밖에까지 미치자 고려에서는 임간(林幹)을 파견하여 대항하게 했으나 도리어 패배당하여 다시 윤관(尹瓘)을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진의 기병을 물리치지 못하고 전세가 불리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왔다.
윤관은 패전의 원인이 적의 기병에 우리의 보병이 대적하지 못한 데 있으니, 마땅히 군사를 쉬게 하고 사졸을 양성, 훈련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고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이 건의에 따라 고려조정은 별무반을 편성하는 일에 착수하여 기병부대 양성에 역점을 두었고, 또한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1107년(예종 2) 12월 윤관을 도원수로 삼아 17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여진정벌의 길에 오르게 하였다.
고려군은 먼저 점령지역의 여진군을 토벌하고, 다음은 수륙 양면에 의한 전격전을 전개하여 장성의 130여 마을을 점령하였다. 윤관은 이 수복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 요지인 함주를 비롯하여 9개 소의 요지에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윤관의 9성이다.
그 뒤 여진이 계속 반격을 하는 한편, 조공할 것을 조건으로 9성을 돌려 달라고 애걸하자 고려는 멀리 떨어진 변경을 확보, 경영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109년 7월 여진의 맹세를 받은 뒤 9성을 돌려 주었다.
③ 고려의 대몽항쟁: 정예 기마부대로 인접 국가를 정복하고 있던 몽골의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의 수도 연경을 함락시키고 황하 이북의 땅을 그의 판도 안에 넣었다.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의 거란족은 금나라의 쇠퇴를 틈타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확충하다 몽골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몽골군과의 충돌에서 패한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8월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여 의주에서 평양에 이르는 서북지방에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1218년 8월 거란은 또다시 고려에 침입하여 고려군과 싸우다가 강동성에 몰리게 되었다. 이 해 12월 거란 소탕작전의 마무리 단계에서 몽골군은 거란족 격멸을 이유로 동진의 포선만노(蒲鮮萬奴)와 연합하여 이 전투에 개입해 왔다.
고려에서는 몽골의 요청으로 군량미도 내고 병력도 합세시켰다. 몽골은 거란족을 소탕시킨 은혜를 구실로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고려에 강요했으나 고려는 이에 잘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두 나라의 관계가 소원해 가던 중 1225년 1월 몽골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던 도중 도적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몽골은 이를 구실로 1231년 8월 살례탑(撒禮塔)을 선봉으로 하여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골군은 귀주성(구주성)에서 박서(朴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고, 그 일부는 멀리 충주까지 내려갔다.
최우(崔瑀)는 하는 수 없이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화의함으로써 몽골군은 1232년 1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최우는 몽골과의 항쟁을 결의하고, 그 해 6월에 서울을 강화로 옮겼다. 이것은 수군이 없는 몽골군의 허점을 찌른 방책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강화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도 산성이나 섬으로 피난하게 한 고려의 태도가 몽골을 자극하여 그 해 12월 몽골군은 다시 침략을 해왔다.
그러나 몽골 장수 살례탑이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피살되자 곧 철수하였다. 그 뒤 몽골은 동진과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1235년 7월 탕구[唐古]에게 제3차 침입을 하게 하여 1239년까지 5년간 전국을 유린하였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를 석권했던 몽골의 대군도 넓이 약 650m의 강을 건너지 못하여 강화도를 침공하지는 못하였다. 몽골의 요구는 고려왕이 육지로 나와 친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고려가 이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몽골군은 그 뒤에도 제4차(1253) · 제5차(1254∼1255) · 제6차(1255) · 제7차(1257)에 걸쳐 침략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도 1254년의 침략 때는 민중을 살육하는 것은 물론이요 포로로 붙들어 간 남녀만도 20만여 명이나 되었다.
무인정치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崔竩)가 1258년 3월에 피살되자 정권은 일단 왕에게 돌아가고 몽골에 대한 강화가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1259년 4월 태자가 몽골로 출발하여 항복의 뜻을 표하고, 1270년(원종 11)에 개경으로 환도하니 강화로 천도한 지 39년 만이며, 이로써 고려조정은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항몽세력의 핵심인 삼별초는 무인정권이 타도되고 몽골과 강화가 성립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배중손(裵仲孫)의 지휘하에 강화도에서 개경정부와 대립하는 반몽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뒤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부근의 여러 섬과 해안 일대를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자 삼별초는 그 중심 인물의 대부분을 잃고 전력 또한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나머지 병력은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하였다.
1273년 4월 연합군은 제주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격멸하니, 삼별초의 만 3년간에 걸친 대몽항쟁도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고려는 몽골과 치른 40년간의 항쟁을 통하여 한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원나라도 다른 정복국과는 달리 고려왕실과 혈연관계를 맺도록 하는 유화정책을 썼다.
(3) 조선시대의 전쟁
① 임진왜란 · 정유재란: 조선은 건국된 지 200년이 가까워짐에 따라 지배계급은 글에만 열중하여 나약해지고 사회의 기강은 해이해졌으며, 국방에 대한 관심도 약화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국내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장기간의 싸움에서 강력해진 제후들의 군사력을 해외에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체제에 만전을 도모하고자 대륙 침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요청하는 한편,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가 조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일본 실정과 도요토미의 의도를 살피기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1590년(선조 23)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3월 통신사 편에 보내 온 도요토미의 답서에 ‘정명가도(征明假道)’가 있어 침략 의도가 명백했는데도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즉,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 이면에는 동인 · 서인으로 나누어진 당시의 정치상황이 그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침략전쟁의 모든 준비를 갖춘 도요토미는 1592년 4월 15만 대군을 9진으로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이 부대는 부산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뒤따라 들어온 가토[加藤淸正] · 구로다[黑田長政] 등과 함께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편, 구키[九鬼嘉薩] 등이 지휘하는 9,000여 명의 수군은 바다에서 이들을 지원, 엄호하게 하였다.
왜병이 침입했다는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신립(申砬)을 도순변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왜병의 진격을 저지하게 했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패하였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 신립이 패하자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蒙塵)하였다.
왜적은 상륙한 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였다. 서울을 함락한 왜병은 다시 북진하여 6월 13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 가토는 함경도 끝까지 북상하여 두 왕자를 사로잡았다.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일본의 수군은 700여 척의 병선으로 편성, 4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조선의 서해안을 우회하여 고니시군과 수륙 합동작전으로 북상하는 것이었다. 경상도의 수군은 일본 수군의 위세에 밀려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패주하여 경상도 일대의 해상권을 일본 수군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구원을 청하자 평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병선, 특히 거북선을 이끌고 곳곳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더욱이 7월 8일 한산도해전에서는 적 수군의 주력 함대 73척 중 59척을 빼앗고 격파하였으며, 또한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함으로써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일본의 지상군은 그들의 수군이 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함에 따라 병참선이 위협을 당하자 이제는 더 북상할 기세를 잃고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관군이 왜적을 막지 못하자 국내 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趙憲)은 충청도 옥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충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곽재우(郭再祐)는 경상도 의령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령 · 창녕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 서산대사)은 팔도의 승려에게 격문(檄文)을 발하여 그의 제자 유정(惟政: 사명당)의 원조를 얻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탈환전에 공을 세웠다.
또 조선이 요청한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하였다. 명나라는 처음에는 명장 조승훈(祖承訓)의 휘하에 5,000명의 군사를 보내어 7월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여 화의를 교섭하게 하는 한편, 다시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3000명으로 구원하게 하였다.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1593년 1월 8일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일본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1월의 벽제관전투에서 패배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군과 합동하여 2월 12일 행주산성을 공격했으나 권율(權慄)이 배수의 진을 치고 끝내 왜군의 공격을 무찔렀다. 이것은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섬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벽제관전투 이후 이여송은 평양에 머물면서 심유경을 서울의 왜진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왜군도 조선 수군의 활동으로 병참선에 대한 위협을 받고, 또한 각지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진주,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전의를 잃었으므로 화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1593년 4월부터 서울에서 철수하여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성을 쌓고 강화조약의 조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화의 진행중인 2월 18일 왜병은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한편, 심유경이 왜군과 함께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3년간 사신이 내왕했으나 도요토미가 너무나 무리한 조건을 내놓았기 때문에 화의는 결국 결렬되었다.
이에 도요토미는 1597년 1월 14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다시 침공해 왔으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왜군의 활동이 여의치 못했는데, 그것은 조선군이 전비를 갖추었고, 또 명나라의 원군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순신은 모함으로 옥에 갇혔으며, 7월 15일 수군은 다대포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 의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시작하여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조선 · 명나라의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여 9월 6일 소사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함으로써 전세를 만회하였다.
수군이 패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여 남은 병선 12척으로 수군을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적선 133척과 격전을 벌여 적선 31척을 격침시키고 다수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다시 잡았다.
그 동안 육상에서는 명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영향으로 일본군의 사기가 떨어져 전투는 부진상태에 놓였다. 특히,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에서 격전을 벌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승리를 얻었으나,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끝으로 전후 7년에 걸친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 · 명나라와 일본의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팔도가 거의 전쟁터화되어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한편, 조정은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훈련도감의 설치, 삼수병에 의한 무예의 훈련,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를 발명하였고, 조총과 불랑기(佛狼機: 포르투갈 사람이 전래한 대포) 등을 제조하였다.
명나라는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의 소모와 재정의 문란으로 새로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가 몰락하고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전쟁은 처음의 목적인 도요토미의 체제 안전 및 유지에 대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무익한 전쟁으로 한일 두 민족의 원한관계를 뿌리깊게 만들었다.
② 병자호란: 1627년(인조 5) 1월의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뒤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을 강요하는 등 압력을 가하고, 또 1632년에는 형제관계를 고쳐 군신관계를 맺고 조공을 늘리라고 요구하였다.
후금의 태종은 황제의 존호를 사용하기 위해 1636년 12월 용골대(龍骨大) 등을 보내어 황제로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은 조선의 이런 도전적인 태도에 대하여 원정군 10만을 편성, 청태종이 지휘하여 그 해 12월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청군은 이 길을 피해 서울로 직행하여 진격하니, 출발한 지 10일 만에 서울 근교에 도달하였다.
조정에서는 바로 그 전날 비로소 청군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서둘러 두 왕자 등을 강화로 피난시켰다. 그러나 인조는 길이 청군에 의해 차단되어 12월 4일 밤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청군의 선봉은 벌써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다른 부대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서울에 입성하였다. 따라서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하여 성 내의 장병들은 사기를 잃었고, 구원군은 도중에서 모두 청군에게 격파당했으므로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마침내 항복하기로 하였다.
1월 10일 이후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청태종의 요구는 조선의 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인도하면 화의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처음에는 이 제안에 대해 주저했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부득이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 송파)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큰 치욕이었다.
조정은 청나라의 가혹한 요구조건을 수락하여 화의가 체결되었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이 인질로 잡혀갔다. 그리고 주전파의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 홍익한(洪翼漢) 등 3학사는 잡혀가 참형을 당하였다.
그 뒤 1639년 청나라는 조선에 강요하여 청태종의 송덕비를 삼전도에 세우게 했으며, 조선은 청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 후 군비를 갖추어 북벌계획을 비밀리에 진행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③ 병인양요 · 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도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고종 3) 1월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신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 때 탈출한 리델(Ridel, F. C.) 신부의 보고를 접한 프랑스 공사는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 P. G.) 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으며, 로즈 제독은 그 해 9월 군함 3척을 보내어 지형을 정찰한 뒤 철수하였다.
그 뒤 10월에 다시 군함 7척, 육전대 600명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프랑스는 선교사 살해에 대하여 항의하는 한편, 10월 14일 일부는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하고 무기와 양식 및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10월 26일 프랑스군의 다른 부대(병력 120명)는 서울로 가는 길목의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에 의해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였다.
앞서 강화부를 점령한 부대는 11월 9일 정족산성을 점령하고자 했으나,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가 지휘하는 500명의 매복한 포수의 기습에 의해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당하였다. 로즈 제독은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강화부의 여러 관아를 불사르고는 11월 18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양에서 프랑스 정부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반면에 대원군은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고집하여 천주교 탄압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같은 해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에서 조선 관헌과 충돌하여 소각된 일이 있었다. 그 뒤 미국 정부는 조선을 문책하는 동시에 강제로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는 로(Low, F.) 공사에게 훈령하여 아시아 함대를 출동하게 하였다.
1871년 로는 로저스(Rodgers, J.) 제독에게 군함 5척에 해병대 1,200명을 지휘하여 남양(南陽) 앞바다에 와서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하도록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6월 1일 그들의 일대가 강화해협을 측량하고자 강화도 광성진 앞에 왔을 때 요새의 병사들이 포격을 가하자 미군들도 이에 대응하여 사격을 하였다.
그 뒤 외교 교섭을 했으나 조선 정부가 완강히 거절하자 6월 10일 651명의 해병대와 7문의 포를 가지고 초지진 · 덕진을 점령하고, 다시 북진하여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신미양요이다. 서로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져 중군 어재연(魚在淵) 등 243명이 전사하고 2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미군은 맥키(Mekee) 중위 이하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로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로부터 협상 소식이 올 것으로 기대하여 1주일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더 이상 전투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생각하고 철수하였다.
전쟁이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미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쟁에서는 패한 결과가 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에서 외국군을 격파한 대원군은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4) 항일독립운동
일제는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한반도 침략 및 대륙 진출을 실현하게 되었다. 더욱이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으로 한반도의 정치 실권은 거의 일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은 각지의 의병과 합류하여 일제에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08년을 고비로 의병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으며, 인명의 희생만도 1만 7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따라 국내에서 무장독립항쟁을 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인식하여 동북만주 및 연해주로 이동해서 독립군 전투를 전개하게 되었다.
1919년 3 · 1운동 후 항일무력투쟁이 만주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1920년까지 군사활동이 가장 활발했는데, 만포진 공격 및 두만강 연안에서의 유격전, 그리고 청산리전투는 일본군과 대항한 독립군에게 혁혁한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1920년 만주의 독립단체 총 수는 22개, 무장군인은 약 2,000명이나 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의 세력이 만주에까지 미치자 독립군은 근거지를 잃게 되어 시베리아 등지로 이동하기도 하고 일부는 상해로 모여들어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함으로써, 이전의 외교투쟁노선을 지양하고 무력항일투쟁으로 서서히 그 성격을 변화시켜 갔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는 중국 대륙에 침공한 일제를 몰아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따라서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태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광복군은 창설 초 중국 정부와의 협정으로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 · 감독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1944년 8월 28일 독자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광복군의 당면문제는 병력 증강을 위한 초모활동과 첩보공작이었다. 1943년 6월에는 한영군의 합작 교섭이 성립되어 영국군에 파견됨으로써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을 도와 전단 작성과 포로 심문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광복군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여 미국과의 제휴로 본국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나아가서는 한반도에 연합 진공하기 위하여 1945년 5월 한미합작 특수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예상보다 빠른 항복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광복군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항복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미소 양군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고 말았다.
① 6 · 25전쟁: 1943년 11월 미국 · 영국 · 중국의 3거두(巨頭)는 카이로회담에서 공동선언을 통하여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이른바 카이로선언을 하였고, 이 결의는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은 기정 사실화되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미군과 소련군은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38도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각각 진주하였다. 그 뒤 한반도문제를 두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5년간 한국신탁통치안을 결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부딪치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소련측이 찬탁을 주장하는 단체들만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고집하여 모든 정치단체의 참여를 주장한 미국측의 주장과 엇갈림으로써 이 회의는 결렬되었다.
미국은 1947년 9월에 한국 독립문제를 유엔에 제출하였다. 미국은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 · 소 양군은 철퇴할 것이며, 이러한 모든 절차를 감시 및 협의하기 위해 유엔한국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로 유엔총회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이때 북한과 소련은 외군 철수 · 통일정부 수립 등 선전적인 구호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한편, 김일성(金日成)을 내세워 소련의 괴뢰정권을 만들고 각종 군사 원조를 제공하여 20여 만의 중무장한 10여 개 전투사단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취약점을 이용하여 제주 4 · 3사건과 여수 · 순천사건 등 교란작전을 폈으나 실패하자, 무력으로 남한 적화를 달성하겠다는 야욕으로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펴면서 남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주한 미군이 철수한 데 이어 1950년 1월 애치슨(Acheson, D. G.) 미 국무장관이 “한국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등 미국의 일관성 없는 대한정책에 고무되어, 마침내는 소련과 중공의 지원 아래 1950년 6월 25일 새벽, 일제히 38도선 전역에 걸쳐 불법적인 남침을 시작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한국군은 빈약한 무기로 맞서 싸웠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러한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에 대하여 유엔은 6월 25일 오후 2시에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공산군의 즉각 철퇴를 결의하였으며, 그 달 27일 재개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다시 공산군의 남침은 불법이며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고 규정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였다.
동시에 유엔군을 파견하여 북한 공산집단의 침공을 격퇴시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 캐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 필리핀 등 16개 우방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한국군과 미국군은 북한의 남진을 막지 못하고 7월 말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9월 15일 새벽 유엔군 및 한국 해병대가 맥아더(MacArthur, D.) 장군의 진두 지휘로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해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인천 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방위선의 한국군 및 유엔군도 9월 16일을 기하여 총공세를 취한 결과 10월 1일에는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계속, 10월 3일 북한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동해안 쪽의 한국군 제3사단은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으며, 수도사단은 10월 17일 흥남, 24일에는 청진을 점령하였다.
한편, 서부 전선에서는 한국군 제6사단의 일부 병력이 10월 26일 초산을 점령했으며, 서해안으로 진격하고 있던 유엔군은 신의주 남방 16㎞까지 진출하였다. 인민군이 거의 붕괴상태에 이르자 약 30만의 중공군이 10월 중순에 한국 전선에 불법 개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세는 또 다시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은 부득이 철수를 하다가 오산-제천-담양-삼척을 잇는 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여 반격작전에 대비하였다.
1월 25일부터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되어 3월 18일에는 서울을 다시 탈환했으며, 3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38도선의 재돌파를 명령하여 북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4월 11일 트루먼(Truman, H. S.)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그가 행한 현지 정전협상의 요청성명 등을 이유로 유엔군 총사령관과 기타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미국 제8군 사령관이던 리지웨이(Ridgway, M. B.) 장군을 임명하였다.
유엔군은 화력과 기동력의 우세를 활용하여 중공군의 공세를 좌절시키는 동시에 막대한 인적 손실을 입힘으로써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사태의 변화를 주시해오던 소련은 중공군 재건을 위하여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엔 주재 소련 대사 말리크(Malik, Y.)에게 1951년 6월 23일 휴전회담을 제의하도록 하였다.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전투행위는 회담과는 별도로 계속되었지만 전선은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런데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Stalin, J. V.)이 사망한 뒤, 4월 6일 장기간 휴회한 회담이 재개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조인,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상잔의 참극은 일단 휴전으로 멈추게 되었다.
② 한국군의 월남(베트남)파병: 1964년 7월 15일 월남(지금의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에 의해 최초로 그 해 9월 1개 의무중대와 소수의 태권도교관단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에는 건설지원단을 정식으로 파견함으로써 월남공화국의 대공투쟁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 뒤 한국은 해상 수송 지원을 위한 해군 수송전대, 건설지원단 자체 경비부대, 의무증원부대 등을 계속 파월시켰다.
1965년 6월 25일 월남 정부에서 한국군의 전투부대 파월을 정식 요청하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를 10월에 파월하기로 결정하였다.
파월부대가 월남의 퀴논에 도착한 것은 10월 22일로 퀴논 부근의 전략지역에 위치하여 퀴논을 확보하고 책임지역 내의 19번 도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다른 부대와 협조하여 전술지역 확장 준비를 하였다. 파월된 전투부대는 수도사단과 해병 제2여단이었다.
1966년 2월 정부는 다시 월남 정부로부터 전투 병력 증파에 관한 간곡한 요청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전투 병력을 증파하는 데 대한 국내외 정세, 특히 우리의 안전보장문제를 중심으로 신중히 검토하여 국무회의 의결과 국회 의결을 거쳐 1개 연대를 포함한 1개 전투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부대는 9월과 10월 사이에 3진으로 나누어 월남에 상륙하여 작전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로써 파월된 한국군 부대는 육군 맹호사단 · 백마사단 · 건설지원단, 해병 청룡부대, 해군 백구부대, 공군 은마부대 등으로 총병력은 4만 8000명이었다. 이들은 파월된 뒤 대부대 작전 1,171회, 소부대 작전 5만 7636회의 많은 작전과 대민 지원을 수행하여 월남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였다.
1971년 1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월남군의 전투력이 빠른 속도로 증강되고 있기 때문에 주월 한국군의 감축문제를 검토중이며, 그 시기는 월남 정부와 미국을 비롯한 참전연합국과 충분히 협의한 후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다.
4월 23일 제5차 월남참전국 외상회담에서 주월 한국군의 1개 사단 감축을 결정하고 해병 제2여단을 포함한 1만 명의 제1단계 철수를 1971년 12월부터 1972년 4월까지 완료하였다.
1973년 1월 23일 닉슨(Nixon, R. M.) 미국 대통령과 티우 월남 대통령이 월남휴전일을 1973년 1월 28일 08:00시부로 실시한다는 발표를 하자, 주월 한국군을 철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여 3월 23일 완전히 철수함으로써 총 3만 6856명의 주월 한국군 철수작전을 성공리에 끝냈다. 만 7년 5개월간의 월남 파병에는 군사상, 국제관계에서 여러 가지 의의가 있었다.
① 정치적 관점에서는 대공투쟁과 집단 안전보장체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단결과 해외 진출을 촉진할 수 있었으며, 반공의식이 높아지고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하였다.
② 군사적 관점에서는 미군의 계속 주둔과 한국 방위 보장의 확보, 국방력 강화, 특히 연인원 32만여 명의 전투 경험자 획득은 우리의 국방력 강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③ 경제적 관점에서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월남전 참전의 성과는 4,800여 명의 인명 희생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