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竹山). 아버지는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박인석(朴仁碩)이다.
1231년(고종 18)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재임 중 몽고병을 물리쳤다. 그 해 9월 몽고군 원수 사르타이[撒禮塔]가 철주(鐵州: 지금의 鐵山)를 함락한 후 구주(龜州: 지금의 龜城)를 공격해 왔다.
박서는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의 김경손(金慶孫), 정주·삭주·위주(渭州: 지금의 渭原)·태주(泰州: 지금의 泰川)의 수령(守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구주에 모여 기습작전을 써서 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몽고군은 계속해 인질을 성내로 보내 항복을 권하기도 하고, 정예부대로써 성을 강습하고, 누거(樓車: 망루를 설치한 수레)와 목상(木床)·대포차 등 온갖 무기로 공격해 왔다. 이러한 몽골군에 대항해 포차(砲車)를 쏘아 돌을 날려 대항하고, 물에 갠 진흙을 던져 불을 끄는 등 임기응변으로 분전함으로써 1개월 동안 온갖 수단을 다해 공격하던 적을 끝내 물리쳤다.
그 해 12월 몽고가 다시 구름사다리[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자 박서는 대우포(大于浦)로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여 모두 부셔버리니 구름사다리가 접근할 수 없었다.
1232년 1월 후군지병마사(後軍知兵馬事) 최임수(崔林壽),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가 구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자 서너 차례 거부하다가 국법을 어길 수 없어 항복하였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죽산에 있다가 다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