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은 오래되고 유서 깊은 서화와 각종 기물로서 희소적·미술적 가치를 지닌 물품이다. 현재에는 고미술품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인다. 골동품을 수집하고 완상하는 풍조는 조선 후기에 실학파 문인들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들은 골동품을 선인들의 고아한 운치가 깃든 것으로 여기며 미적으로 감상하였다. 1905년을 전후하여 골동품이 경제적 이익 추구의 대상으로 변질되며 도굴과 위조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골동품 수집가는 전형필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민족문화유산을 수호하려는 차원에서 대규모로 골동품을 수집했다.
골동(汨董) 또는 고완(古玩)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는 주로 고동(古董)이라 불렀으며, 현재는 고미술품이라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골동이라는 말은 옛 그릇을 뜻하는 홀동(匢董)이 와전되어 생겼다는 설과 뼈를 장시간 고아서 끓인 국인 골동갱(骨董羹)이 오랫동안 애완된 고기(古器)에 비유되어 일컬어지면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중국 송나라의 조희고(趙希鴣)는 그의 『동천청록집(洞天淸祿集)』에서 고금(古琴), 고연(古硯), 고종정이기(古鐘鼎彛器), 수적(水滴), 고한묵진적(古翰墨眞蹟), 고금석각(古金石刻), 고화(古畵) 등을 골동품으로 꼽았다.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의 『골동십삼설(骨董十三說)』에서는 4류11품(四類十一品)으로 나누어 금(金), 옥(玉), 서화(書畵), 석인(石印), 전각(鐫刻), 요기(窯器), 칠기(漆器), 거문고[琴], 검(劍), 거울[鏡], 벼루[硯]를 들었다.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는 북송의 문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명 · 청 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서화의 경우 종래의 궁정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수집 풍조가 고려 중기부터 일부 문인들 사이로 확산되면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골동품에 대한 관심은 조선 전기를 통하여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성리학적 이념 때문에 고조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흐름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학파 문인들을 중심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태도로 접근하면서 골동품을 수집하고 완상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특히 박지원(朴趾源)과 박제가(朴齊家) 등 북학파 계열의 지식인들은 연경(燕京)을 내왕하면서 골동품을 파는 점포에 들르거나 『박고도(博古圖)』, 『서청고감(西淸古鑑)』 등의 골동 관련 문헌들을 접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식견을 높여 당시 문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골동품을 단순한 사치품이 아닌 선인들의 고아한 격조와 운치가 깃든 고완품으로서 성정(性情)과 호고(好古)의 취미를 길러주고 풍류와 정취 있는 생활을 느끼게 하는 매체로 여겼다. 단순한 수집보다는 그 진수를 향유할 수 있는 안목과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정확한 감식력을 갖출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골동품을 완상하고 식견을 구비하는 것을 문인의 감상지학(鑑賞之學)이라 하여 교양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문인 취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전개되었던 골동품의 수집과 애완 풍조는 1905년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건너온 이 방면의 전문적인 고미술품 상인과 중개인들에 의하여 경제적 이익 추구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관심의 증대와 함께 거래가 본격화되었다. 골동품 매매의 성황은 도굴의 자행과 더불어 도자기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국외로 반출되고 위조품이 제작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규모가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골동품의 거래는 일제강점기에 골동상 모임인 경성미술구락부의 월례 교환회와 경매를 통하여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광복 이후 1970년대부터 경제가 부흥하면서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골동품의 매매는 크게 성행되었다. 서울의 경우 인사동 · 관훈동 · 장안평에 전문 상점이 밀집해 있다.
대표적인 수집가로는 조선 후기의 김광수(金光遂), 김광국(金光國), 서상수(徐常修), 김정희(金正喜), 개화기의 오세창(吳世昌), 일제강점기 파괴되고 산일된 골동품을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라는 차원에서 대규모로 모았던 전형필(全鎣弼)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