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필 ()

전형필
전형필
회화
인물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수장가.
이칭
천뢰(天賚)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옥정연재(玉井硏齋)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62년
본관
정선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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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수장가로 문화유산 수집가이다. 호는 간송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으로 민족 유산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8년 서울 성북동 북단장 내에 보화각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과 서예,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유산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전형필의 가옥은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수장가.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 · 지산(芝山) · 취설재(翠雪齋) · 옥정연재(玉井硏齋). 서울 출생. 중군(中軍, 西班, 정3품) 전계훈(全啓勳)의 증손으로,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전명기(全命基)의 아들이다. 증조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인멸되지 않게 한 곳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 유산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 그리고 이런 문화적 민족 운동에 공명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이러한 소망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그래서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당시에는 한적한 교외이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고(1934년),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오세창의 측근 문사들과 교유를 가졌다. 권동진(權東鎭) · 민형식(閔衡植) · 고희동(高羲東) · 지운영(池雲英) 등의 전배(前輩)들과 이상범(李象範) · 노수현(盧壽鉉) · 이마동(李馬銅) · 김영랑(金永郎) 등의 동년배들이 그들이다. 이들과의 교유 속에서 그의 탁월한 예술 감각은 자신의 서화 자체를 가경(佳境)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감식안을 청람(靑覽)의 경지로 향상시켜 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능력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10만 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유산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서성(書聖) · 화성(畫聖)으로 높이 추앙할 수 있는 김정희(金正喜)정선(鄭敾)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그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심사정(沈師正) · 김홍도(金弘道) · 장승업(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은 물론,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 · 불구 · 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유산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 자료인 중국 역대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헌 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하여 한적(漢籍)으로 1만 권의 장서를 이루어놓았다. 그리고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 관계 서적들도 가능한 한 수집하여 장차 연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재 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1940년 6월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에 착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1945.10.∼1946.10.),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으나(1954년), 항상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시은(市隱)을 자처하였다. 1960년 김상기(金庠基) · 김원룡(金元龍) · 진홍섭(秦弘燮) · 최순우(崔淳雨) · 황수영(黃壽永) 등과 같이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1월에 죽자,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추서되고, 196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 뒤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를 설립하고 그가 마련해 놓은 연구 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 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칭되어 연구소에 부속되어 있다.

한편 전형필의 가옥이 2012년 12월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된 바 있으며, 2014년 10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정선전씨총보(旌善全氏總譜)』
『간송문화』1(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72)
「간송선생의 서거를 애도한다」(고고미술동인회, 『고고미술』19·20,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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