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은 과수를 전문적이고 집약적으로 재배하는 농장이다. 도난·풍해·짐승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생울타리나 담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과일을 집약적으로 재배한다. 우리나라에는 기후·품질 및 소비지와의 거리 등에 따라 많은 과수주산단지가 형성되었다. 서울의 먹골배, 대구·충주·예산·영동의 사과, 안성·대전·안양의 포도, 나주·울산의 배, 전주의 복숭아, 양주의 밤, 제주도의 감귤 등 과수원들이 집단을 이루어 단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과수원의 면적은 1996년 17만㏊, 생산량은 230만t으로 국민 1인당 연간 54㎏ 정도의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도난 · 풍해 · 짐승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생울타리나 담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과일을 집약적으로 재배하는 농장을 말한다.
『제민요술(齊民要術)』(중국 최고의 농서로 北魏의 高陽太守 賈思勰이 지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과수재배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에 많은 종류가 재배되었다고 하며, 『고려사』 식화지(食貨誌)에 의하면 1188년(명종 18) 왕이 “밤나무 · 배나무 · 잣나무 · 대추나무 등을 많이 재배하여 이(利)를 얻도록 하라”고 명하였다고 하니, 이때 어느 정도 과수원 형태를 갖추어 재배한 곳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는 감귤 · 능금 · 앵두 · 대추 · 배 · 감 · 유자 · 석류 등이 재배되었는데 품질이 좋은 것은 왕실에 진상도 하였다. 뒤에는 이런 진상을 기화로 지방관속들의 행패가 심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과수원의 확장이나 발전을 저해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188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개량된 과수가 도입되어 여러 곳에 심어졌으나, 재배기술의 부족으로 관상수 구실을 하다가 끝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1901년 함경남도 원산 근교에 윤병수(尹秉秀)가 10㏊에 달하는 대규모의 과수원을 조성하고 ‘학농원(學農園)’이라 이름을 붙여 주로 사과를 재배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성을 띤 민간인의 과수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수원은 그 뒤 좋은 성적을 내면서 경영되어 오다가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비행장이 되었다.
1906년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둑도(纛島, 뚝섬)에 12㏊ 규모의 원예모범장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과수의 개량품종을 외국에서 도입하여 재배시험을 실시하고 묘목을 생산, 보급하여 전국에 많은 과수원이 생기게 되었다.
1910년 이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많은 과수원이 일본인들의 손으로 경영되었는데, 1940년경부터 제2차세계대전에 대비한 식량증산정책으로 많은 과수원이 제거되고 대신 식량작물을 심게 되니 과수원은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광복 후 과수원은 적산(敵産)으로 되어 우리나라 사람이 관리하게 되었으나, 농약 · 비료 등 여러 가지 생산자재의 고갈과 기술부족으로 관리를 제대로 못하게 되니 자연히 황폐일로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함흥에서 과수원을 손수 경영하면서 1938년 우리말로 『실험조선과수재배법』이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는 김성원(金聲遠)이 월남하여 농사원 원예과장, 경상북도 농촌진흥원원장을 역임하면서 몸소 기술지도를 하고 직접 과수원을 방문하는 등 활약을 함으로써 과수원 소생에 큰 힘이 되었다.
그 뒤 6 · 25전쟁으로 다시 황폐되었고, 수복 후부터 1950년대는 빈곤 속에 과수원의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원예시험장에 과수과가 설립되고 이광연(李光然)이 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연구인력을 대폭강화하고 연구와 기술지도에 역점을 두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는 과실의 품질은 고사하고 수량만 많이 내면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으므로 감귤나무와 사과나무는 10여 그루만 있어도 대학 학비를 대줄 수 있을 정도로 수익성이 높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왜성사과나무가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나 농가에 보급은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시기에는 김종천(金鍾天)이 과수과장을 맡아 원예시험장 과수과를 현재 수원시 이목동으로 이전하였고 상당한 규모의 시험장과 실험실을 구비하여 우리나라 과수연구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뒤 과수과는 과수육종과와 과수재배과로 불리 개편되었다. 이때부터는 사과뿐 아니라 여러 가지 과수가 맛좋고 색깔좋은 새 품종으로 갱신되는 새로운 과수원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는 기후 · 품질 및 소비지와의 거리 등에 따라 많은 과수주산단지(果樹主産團地)가 형성되었다. 서울의 유명한 먹골배, 대구 · 충주 · 예산 · 영동의 사과, 안성 · 대전 · 안양의 포도, 나주 · 울산의 배, 전주의 복숭아, 양주의 밤, 제주도의 감귤 등 수없이 많은 과수원들이 집단을 이루어 단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서울의 먹골배는 백두산에서 전달되는 봉화(烽火)를 받아 최종 종착지인 남산에 전달하는 마지막 산이었던 서울 묵동에 있는 봉화산 주위의 과수원에서 생산되는 배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곳은 옛날에 궁중에서 쫓겨난 내시들이 터를 잡고 잠업(蠶業)과 과수재배를 시작한 곳이다. 그때는 물론, ‘청실리(靑實梨)’라고 하는 재래종 배를 재배하였고, 좋은 것을 골라 궁중에 헌공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개량품종인 장십랑 · 신고 등으로 바뀌었지만, 이 지역의 배는 품질이 우수하여 지금도 먹골배라고 하면 알아 주는 유명한 산지가 되었고, 그 명성 때문에 지금도 서울근교에서 생산되는 배를 먹골배라고 하여 판매하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서울 자하문 밖의 능금재배이다. 능금이라는 이름은 임금(林檎)에서 유래된 것인데 전설에 의하면, 임금은 임금[王]과 발음이 같아서 귀중한 과일로 취급되어 고려 때는 수도인 개성에 재배를 장려하였고, 조선시대는 수도인 서울에서 재배가 장려되었다고 한다.
서울 자하문 밖 세검정에는 유명한 과수원이 많이 형성되어 재배되어 왔고, 능금은 말복(末伏) 때부터 처서(處暑) 때까지에 성숙되며, 비교적 맛이 좋고 더위를 식히는 데 좋은 과일이라 하여 노소를 막론하고 즐겨 먹었다.
이렇게 유명하였던 능금은 개량품종이 보급됨에 따라 경제성이 없어져 서서히 그 재배면적이 감소되어가다가, 지금은 극소수만이 재배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능금은 사과 육종에는 좋은 자료가 되므로 세계 여러 나라 학자들이 자하문 밖 능금나무를 찾아보고 귀중한 자료로 수집하기도 한다.
영동의 사과는 그 역사가 아주 짧은데, 전국적으로 국광과 홍옥이 재배되고 있던 1969년 일본의 원예학자 가지우라(梶浦)가 한국원예학회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때 당시 인천원예협동조합 이사로 있던 김두칠(金斗七)의 요청에 따라, 유망한 것으로 예측되는 동북7호(지금의 후지品種)묘목 다섯 그루를 보내준 것을, 지금 영동군 심천에 사는 강구홍이 그 중 두그루를 분양받아 처음으로 심은 것이다.
결실 후에 보니 크기 · 색깔 · 맛 등이 국광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이 인정되어 서서히 보급되었는데, 이것이 이 지역에 가장 먼저 보급되고 결실되었기 때문에 영동의 사과 또는 옥천의 사과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과수원은 쓸모없는 하천부지 자갈밭을 불하받아 지게로 산흙을 져다 1m 이상 돋운 뒤에 거기에 과수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노력과 끈기는 보는 사람마다 탄복을 금치 못하게 하는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래서 그 대가로 인해 새로운 영동의 사과를 이룩하는 핵심이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때 물론 우리나라 여러 과수원에도 후지품종이 몇 그루씩 심어져 있기는 하였지만 영동보다 늦었던 것 같다.
대구의 사과는 지금은 경북의 사과로 변하였듯이 경상북도 전역에 확장된 세계적인 사과지대라고 할 수 있다. 품종도 좋은 것으로 갱신되었고 재배기술도 향상되어 좋은 과실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최근 이 지방 사과를 선전하기 위하여 ‘능금의 날’을 제정하고 품평회를 개최하며 ‘능금아가씨(미스 능금)선발대회’도 매년 실시하고 있다.
제주도의 감귤재배는 1960년대 초부터 급진적으로 발전되어 제주도의 수입을 높이는 큰 자원이 되고 있다. 기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만이 재배할 수 있다. 서귀포에서 재배가 이루어지던 것이 지금은 남제주 · 북제주 전역에 보급되어, 국내 소비량을 초과하는 과잉생산현상을 보여 감귤가격이 하락되는 현상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매년 ‘감귤아가씨선발대회’ 등 푸짐한 축제를 열고 있다.
1960년대는 과수원의 모든 작업이 인력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이고, 또 이때는 인건비가 싸서 과수원에는 매일 수십 명씩의 부녀자들이 과실을 솎아 주고, 그늘지는 잎을 따 주고, 봉지를 씌워 주는 일을 하였다. 여러 과수원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과실나무에 달아매어 놓고 구성진 가요곡에 맞추어 콧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하던 광경은,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없는 즐거운 과수원 풍경이었다.
과수원에는 원두막이 있어 낮에는 과실을 판매하고 밤에는 과수원을 지키는 구실을 하게 된다. 과수원 근처의 길을 따라 젊은이들의 낭만이 있기도 하고, 원두막은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 구실도 하였다.
마을 어린이들이 과수원에 숨어들어 과실을 서리하다 들키면 그 주인은 큰 소리로 꾸짖기는 하지만, 이미 딴 과실은 빼앗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가게 하던 후덕한 과수원 인심도 많았는데, 요즈음에는 고발하고 변상시키는 것이 일쑤인 각박한 인심도 많아 대조적인 풍경이라고 하겠다.
과수원의 모든 작업을 기계와 약제를 써서 끝내버리는 지금의 과수원에서는 지난날의 낭만을 찾아볼 수 없으니, 한편 아쉬운 마음도 금할 길이 없다. 이렇게 기나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의 과수원은 1996년 현재 17만㏊를 넘어섰으며, 생산량은 230만t에 이르러 국민 1인당 연간 54㎏ 정도의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1986년부터는 연간 1∼2만t의 과실을 세계 20여개국에 수출하여 상당한 외화를 획득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 과수는 생산량 · 수출량 · 가공량 등이 꾸준히 증가될 전망이어서 유망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