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천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교리, 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정부(挺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8년(선조 31)
사망 연도
1628년(인조 6)
본관
현풍(玄風)
주요 관직
교리|예조정랑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교리, 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정부(挺夫). 곽순충(郭純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곽율(郭慄)이고, 아버지는 곽호선(郭好善)이며, 어머니는 권보(權輔)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생원시에 합격한 뒤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07년 함경도평사(咸鏡道評事)로 나아갔다. 1617년(광해군 9) 장령·부교리를 거쳐 세자시강원필선이 되었으며, 이듬해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광해군 말년까지 사헌부장령, 겸필선·교리 등의 관직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논의가 일어나자 이 논의에 참여하여 찬성하였고, 폐모를 단행할 것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또,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당한 뒤에도 그 궁의 규모를 줄이라고 건의하는 등, 대북세력의 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이이첨(李爾瞻)의 무리로 지목되어 파직된 뒤 중도부처(中道付處: 유배자의 평소 공로 등을 감안하여 유배지로 가는 중간지점의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있게 하던 제도)되었다.

1628년(인조 6) 대북세력의 잔당이 유효립(柳孝立)을 중심으로 역모를 꾀한 것에 연루되어 죽었다. 광해군 초년에 예조정랑으로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9년에는 민생의 어려움을 적절히 지적하는 소를 올렸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