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계헌(季獻), 호는 용호(龍湖). 할아버지는 참판 남세건(南世健)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남응운(南應雲)이며, 어머니는 신세량(辛世良)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586년(선조 19)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지평으로서, 파천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으나 도중에 없어짐으로써 삭직당하였다. 1598년 장령으로 임명되고 이듬해 사간·부수찬·종부시정·부교리를 거쳐 1600년 우부승지, 1602년 호조참의·우승지·도승지가 되고, 1603년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04년 한성부우윤, 1607년 판결사를 거쳐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1608년(광해군 즉위년) 함부로 사람을 죽인 죄로 나국(拿鞫)당하였다. 1610년 강릉부사로 임명되었으나 경주부윤 때의 일로 다시 파직당하였다. 광해군 초년에는 동지춘추관사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4년 대사성, 1615년 예조참의, 1616년 대사간·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한성부좌윤·지돈녕부사에 임명되기도 하지만 광해군 말년까지 주로 대사헌·대사간으로 있으면서, 1617년에 선조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논의를 일으켜 그 정청(庭請)에 참여하고 폐비절목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는 등,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한 대북세력의 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그 전에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공격하고 이이첨을 도와 최기(崔沂)의 처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뒤 유배되어 풀려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