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은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뒤 작품 안에 이름, 그린 장소, 제작 연월일 등의 내용을 적은 기록이다. 낙관·관지라고도 한다. 관의 위치와 서체는 작품의 전체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관의 기입 순서는 맨 먼저 누구의 필법 또는 화법을 본받았는지 표시한다. 다음으로 제작일시와 장소, 누구를 위한 것인지 쓴다. 끝으로 작자의 자나 호, 이름을 적고 그 아래 인장을 찍는다. 작자의 관직, 제작 경위 등을 첨부하기도 하지만 서명만 하는 경우도 있다. 관은 작자, 제작 일시, 경위 등을 담고 있어서 서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중국 송대부터 서화에 관지가 등장했으나 매우 드물었으며, 사용할 경우에도 화면 중의 나무뿌리나 바위 틈새 등에 적어 넣어 눈에 띄지 않게 하였다. 원대에 이르러 문인화의 성행에 따른 시서화일률(詩書畵一律) 풍조가 팽배하면서 제시(題詩)와 함께 관지도 화면 위에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명나라 때부터는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궁정용 원체화(院體畵)를 비롯한 실용화와 장식화 및 기록화 등에는 낙관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관지의 위치와 서체는 서화의 한 부분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에 작품의 전체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도록 위치 선정과 필체 등에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 이에 대한 관심은 중국 명나라 때부터 증대되어 여러 화론서(畵論書)에 제관론(題款論) 또는 서관론(書款論)의 항목이 설정되기도 하였다. 그 이론에 의하면 관지의 위치가 잘못되면 서화를 상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대체로 서예는 글씨가 끝난 곳에, 그림은 화면의 여백에 쓰되 주로 상단 부분에 쓰는 것이 좋다고 하였고, 관자(款字)의 크기는 화면의 규격에 따라 조절하고 너무 번잡스럽게 많이 써도 안 된다고 하였다. 또한 화제(畵題)보다 작게 쓰는 것이 좋으며, 서체는 해서(楷書)와 행서(行書)를, 인장은 전서(篆書)를 많이 사용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까지 관지의 사용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한 풍조에 대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7의 「예기억(禮記臆)」에서 중국은 물론 일본의 서화에는 반드시 누가 그렸다는 것을 밝힌다고 하고 “그런데 우리나라의 풍속에는 관지를 숭상하지 않으며, 심지어 저서나 간각(刊刻)에까지도 누구의 저작임을 기록하지 않으니 당세 사람 중에 그것을 읽는 자로서도 그것이 누구의 저작인지 까마득히 모른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관지의 기입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으나, 보통 누구의 필의(筆意)나 화법을 본받았다는 내용을 담은 임모방(臨模倣)의 표시를 먼저 하고, 다음에 제작일시와 장소, 누구의 부탁으로 누구를 위하여 그리거나 쓴다는 위사(爲寫) 표시, 그리고 끝으로 작자의 자 · 호 · 이름 등을 적고 그 아래 인장을 찍는다.
이 밖에 작자의 연령이나 관직 또는 신병(身病) 상태, 제작 경위 등을 부기하기도 하지만 서명이나 서명인만 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제작시기는 간지(干支)로 적고, 제작 월은 계절을 나타내는 절기로, 제작일은 한 달을 상순과 하순으로 나누어 쓴다.
또한 자보다는 호를 많이 사용하며 당호(堂號)를 쓰기도 한다. 호와 성명을 아울러 쓸 경우에는 반드시 호를 먼저 쓰고, 이름을 뒤에 쓰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인은 음각으로 새긴 백문(白文)의 성명인을 먼저 찍고, 그 밑에 양각으로 된 주문(朱文)의 호인을 찍는 것이 상례이다.
관지는 작품의 제작자는 물론 제작 일시와 경위 등을 담고 있어서 작품의 절대 연대, 제작 배경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