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47세(1328년) 때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가 되어 그 이듬해까지 관동 명승지를 살펴보고, 그 감회를 한시로 읊은 기행시들이다. ≪관동와주≫가 실린 ≪근재집 謹齋集≫ 함주본 권1에 실려있다.
모두 145수로 오언율시 18수, 오언고시 10수, 칠언절구 76수, 칠언율시 34수, 칠언고시 7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 실린 한시문을 보면, 당시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우선 1328년(충숙왕 15) 5월 30일 개성을 출발하여 백령역(白嶺驛)에서 잠자던 밤 큰 비가 쏟아질 때 지은 시나, <대우탄 大雨歎> 등에서 수재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려 근심하는 모습과, 관동지방의 명승인 금강산·국도(國島)·천도(穿島) 등을 관광하러 줄을 잇는 관료들의 접대에 골몰하는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삼탄 蔘歎>·<염호 鹽戶> 등에서는 관료들의 극도에 달한 가렴주구의 모습들을 읊었다.
이 기행시문의 마무리로 쓴 작품이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동와주≫의 한시들을 앎으로써, <관동별곡>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데서 문헌적 의의가 높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