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살상은 높이 20㎝의 입상으로, 본래 삼존불의 협시보살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화재로 인하여 발 아랫부분과 손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신사에 이 불상을 보관한 상자의 뚜껑에는 1699년(元祿 12년)에 기록한 “이 어신체(御神體)는 옛날부터 세키야마 신사의 지주신(地主神)으로서 사중(祠中)에 안치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화재로 인하여 잃어버렸다가 잿속에서 꺼내어 이 상자에 보관한 것”이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상자 안에는 ‘新羅大明神(신라대명신)’ 이라는 묵서(墨書)가 기재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화재로 인하여 손상은 많지만 양식은 매우 고식(古式)이다. 보관의 윗부분과 두 팔의 팔꿈치 아래가 파손되었고 두 발 끝과 팔에서 드리워진 천의(天衣 : 천인이나 선녀의 옷)도 일부 없어졌다. 머리가 약간 한쪽으로 기운 것도 화재의 영향으로 보인다. 귀의 뒤쪽에서 내려온 수발(垂髮 : 뒤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은 고사리형의 곡선을 그리고 있다.
얼굴은 눈·코·입을 날카로운 선으로 깊이 새기고 있다. 입가에는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인 고졸(古拙)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가슴에는 영락 장식이 표현되었으며, 천의가 양어깨를 덮고 다시 양 팔에 걸쳐 아래로 드리워졌다. 가슴 부분에는 상내의(上內衣)의 끝단이 사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 가장자리에는 반팔메트(半Palmette)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허리에는 긴 치마를 두르고, 두 손에서 내려온 천의가 무릎 위에서 U자형으로 교차하고 있다. 치마의 허리를 묶은 끈이 무릎 근처에서 리본 모양의 매듭을 만들었다. 양어깨에서부터 구슬로 연결된 장식인 영락(瓔珞)이 배 앞에서 교차되어 표현되었다. 양팔에서 몸의 좌우에 드리워진 천의는 일부 파손되었지만 지느러미 상태로 좌우로 뻗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뒷면은 치마의 옷자락 무늬를 수직으로 새겨 옷자락의 옷주름 선이 좌우 대칭적으로 표현되었다. 뒷면 중앙 역시 상내의가 비스듬히 지나가고, 거기에 반팔메트의 문양을 새기고 있다.
현재 잃어버린 두 손을 남아있는 팔의 부분으로 추정해 보면,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이나 서산마애불의 협시보살입상과 같이 가슴에서 두 손을 위아래로 모아 보주(寶珠)를 쥐고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봉지보주형의 보살입상은 백제에서 7세기경 유행한 형식으로 추정되며, 이 보살입상의 날씬한 신체표현과 착의형식 등으로 보아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상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 상을 보관한 상자에 ‘신라대명신’이라고 쓰여진 것도 이 상이 옛날 한국에서 건너간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보살입상의 양식은 일본 호류지의 유메도노관음이나 구다라관음과 유사하게 나타나며, 일본 아스카 시대의 보살입상에는 이와 같은 형태의 상이 다수 발견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제에서 전해진 이러한 형태의 불상이 일본 불교조각에 미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봉지보주형(捧持寶珠形 : 보주를 받들어 가지고 있는 모양)의 보살상이 백제 불상의 특성이고 당시 백제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백제에서 건너간 불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 보살입상은 양식상 삼국시대 백제의 상으로 여겨지며, 한국에서 제작되어 전해졌거나 한국계 장인이 일본에서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상은 일본 아스카시대의 불상과 백제 불상과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