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의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93.5㎝)과 거의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의 상태는 20세기 초반에 표면의 건칠을 깎아내고 얼굴과 손 등의 세부를 고치는 수리를 거친 것으로, 원형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은 반가좌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손끝을 오른쪽 뺨에 댄 사유의 자세를 보인다. 머리에는 간단한 형태의 삼산관을 착용하였고 상체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나형(裸形)이다. 하반신의 치마는 대좌에 풍성하게 드리워져 있는데, 오른쪽 무릎 아래의 옷자락이 살짝 반전되고, 대좌에는 여러 겹의 주름을 이룬 치맛자락이 드리워졌다. 허리에 맨 띠는 둥근 환 장식을 통과하여 대좌 뒤편으로 늘어뜨려져 있다.
이 보살상의 형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양식 면에서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보관의 형태를 비롯하여 장식이 적은 세장(細長)한 나형(裸形)의 상반신 그리고 허리에 드리운 옥대(玉帶), 약간 우수를 머금은 온화한 얼굴 표정과 입가에 맴도는 미소, 눈썹·눈꺼풀·콧등·입술의 곡선은 비례감과 더불어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두 무릎에 걸쳐 옷자락 무늬가 새겨져 있지 않다. 그래서 상반신에서 두 발에 이르기까지 동(銅)의 매끄러운 감이 강조되었다. 이 점은 광륭사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목조이므로 동조의 독특한 맛은 나오지 않는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고신라의 6세기 말 7세기 초의 금동불에 나타난 독특한 작풍이 나타난다. 이것은 1968년 국보로 지정된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1976년 국보로 지정된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간송미술관 금동보살입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수가 깃든 듯한 얼굴과 입가의 미소, 세장한 몸체 외에도 동조의 매끄러운 근육의 표현이 이색적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이러한 작풍 및 기법상에서 한 단계 진보된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이 상은 양식상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 계통과 가깝게 비교되므로, 삼국시대에 제작되어 전래된 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재료와 제작기법면에서도 우리나라의 제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일본의 초기 불상들이 모두 노송나무를 사용한 것에 비하여 이 불상은 적송(赤松)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산출되는 목재이다. 또 일본의 초기 불상들이 몸의 각 부분을 여러 개의 나무로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한데 반해 이 상은 한 토막의 나무 전체를 조각해 내었다는 점에서 다른 특색을 보인다.
이 상이 삼국 중 어느 나라의 상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상과 가장 가깝게 비교되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대하여 신라제작설과 백제제작설이 대립되고 있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 가운데 어느 나라 작품인가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제작설이 다수설이다. 다만 이 상이 삼국시대 불상으로서 일본에 전래되어 아스카시대의 불상양식에 영향을 미쳐 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국보로서 그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