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는 ‘교직(校直)’으로 표기하며, 속칭 ‘고직’이라고도 한다. 향교는 지방에 있는 문묘(文廟)로서 공자를 향사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서울의 성균관과 아울러 지방에서 일선 교육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향교에는 건물을 관리하고, 문묘의 향사에 부수되는 여러가지 일을 보살피도록 교지기를 두었다. 향교가 지방의 호족이나 향반(鄕班)·토반(土班)들이 특권을 자행하는 장소로 변하자 교지기는 이들 향교 출입의 양반계층에 예속된 천민계급인 노비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양반에 속한 반노비(班奴婢)와 더불어 이들은 향교에 소속된 교노비(校奴婢)로서 사노비의 하나였다. 이들은 지방의 호족이나 양반, 동성집단들이 조상을 주향(主享)하기 위해 향교에 헌납한 기금이나 토지로써 생계를 유지했으며, 문묘제사에 드는 비용도 거기에서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