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회 ()

현대문학
단체
1933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문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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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33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문학단체.
연원 및 변천

1933년 8월이종명(李鍾鳴)·김유영(金幽影)의 발기로 이효석(李孝石)·이무영(李無影)·유치진(柳致眞)·이태준(李泰俊)·조용만(趙容萬)·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 등 9인이 결성하였다. 그러나 발족한 지 얼마 안 되어 발기인인 이종명·김유영과 이효석이 탈퇴하고 그 대신 박태원(朴泰遠)·이상(李箱)·박팔양(朴八陽)이 가입하였으며, 그 뒤 또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金裕貞)·김환태(金煥泰)가 보충되어 언제나 인원수는 9명이었다.

기능과 역할

특별히 주장한 목표는 없으나, 경향주의 문학에 반하여 ‘순수예술추구’를 취지로 하여 약 3∼4년 동안 월 2∼3회의 모임과 서너 번의 문학강연회, 그리고 『시와 소설』이라는 기관지를 한 번 발행하였다. 이처럼 활동은 소극적이었으나, 당시 신인 및 중견작가로서 이들이 차지하는 문단에서의 역량 등으로 인해 ‘순수예술옹호’라는 문단의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태준은 서정성이 높은 문장과 미의식에 있어서 거의 독보적인 경지를 펼쳐갔다. 이효석도 시골이나 도회의 주변적 인물이 지닌 애수 섞인 삶의 양상에 특출한 묘사력을 가지고 예술적 개성을 성취한 서정적 작가였다.

박태원은 「사흘 굶은 봄달」·「옆집 색시」·「오월의 훈풍」 등을 발표하였고, 표현과 묘사의 기교에 관심을 기울인 작가로서 간결체 문장의 아름다움을 성공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뒤에는 「천변풍경(川邊風景)」과 같은 작품을 써서 풍속적 저변을 들추어내어 사실주의에 기울어져갔다.

이밖에도 정지용의 시에 있어서 상실감의 포착과 그 정서의 표현은 거의 독보적이었고, 감각의 예리성과 섬세함이 형상성을 이루어 사상파(寫像派)의 효시가 되었다. 김기림도 시의 회화적·감각적 심상에 주력한 근대주의적 서정성을 드높인 시인이었다.

의의와 평가

조연현은 ‘구인회’의 문학사적인 의의를 시문학파(詩文學派)에서 유도된 순수문학의 흐름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193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의로는 근대문학의 성격을 현대문학의 성격으로 전환시키고 발전시킨 점에서 그 문학사적 가치를 보유한다고 지적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문학사(韓國現代文學史)』(조연현, 성문각, 1980)
『조선신문학사조사(朝鮮新文學思潮史)』(백철, 신구문화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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