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자(字)는 지숙(志叔), 할아버지는 공조 판서를 지낸 능풍부원군(綾豊府院君) 구인기(具仁墍)이고, 아버지는 진사 구일(具鎰)이다.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불합리한 풍조가 일고 있는 점을 못마땅히 여겨, 이에 동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한 면모가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몇 편의 시조에 나타나고 있다.
시조에 나타나는 중심사상은 당시 세도정치의 문란과 부패상을 풍자하는 한편, 안빈낙도를 구가하는 그러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성품이 당시의 시류에 어긋났음인지 1691년(숙종 17)에는 한때 죄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는 다시 관리에 서용되는 혜택을 받았다. 그리하여 1697년에는 영부사(領府事)인 남구만(南九萬)이 왕에게 추천하여 음관이 되면서, 점차 승진하여 공주목사로 부임하여 한 고을의 행정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당시 암행어사인 김흥경(金興慶)과 이명준(李明俊)에 의해 탐관오리로 지적받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1711년에는 황주목사로 나갔는데, 사간원에 의하여 행정처리를 잘못한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결국 무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