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은 폐쇄사회적 성격이 농후하므로 일반 언어와는 이질적인 언어가 발달하였다. 그 전통의 장구성은 왕권에 대한 외경의식(畏敬意識)과 일반인과 구별하려는 유별의식(有別意識)이었을 것이며, 극존체(極尊體)의 존대법과 겸양법의 발달이 특징인 한편 은어적(隱語的)인 경향도 있다.
예컨대 왕의 이불과 요는 ‘기수’와 ‘프디’, 피는 ‘혈(血)’이라 하여 고유어와 한자어 계통의 이원적 구조 외에 몽고어계가 혼합되어 있다. 마누라(존칭)·수라(진지)·조라치(잡역부) 등이 그것이다.
우리 나라 궁중어의 시원은 신라까지 소급할 수가 있다. 그 뒤 고려는 신라 왕실과의 성혼으로 궁녀를 물려받았고, 조선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고려의 궁녀와 궁료(宮僚)를 데리고 와서 나인과 환시를 삼았으므로, 이런 과정에서 궁중어의 전통은 도중에 약간의 변화는 있었겠으나 조선 말까지 대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몽고어계는 고려 후기 원나라 왕실과의 교혼으로 사실상 복식(服飾)·음식 용어면에 적지 않게 그 영향이 미쳤던 것이다.
오늘날 궁중어는 정치체제의 변동에 의한 조선왕조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고, 특히 조선 조 최후의 왕비인 순정황후(純貞皇后 : 尹妃)의 사망으로 궁중어의 사용자도 없어졌다. 다만 궁중 사극의 대사 가운데 변질된 재생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