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방숙(方叔), 호는 병곡(屛谷).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郎) 권증(權憕)이며, 어머니는 풍산(豊山)유씨(柳氏)로 현감 유원지(柳元之)의 딸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권구가 살던 향리 안동 족적동(足積洞)에서 사창(社倉)을 열어 흉년에 빈민들을 구제하였으며, 향약을 실시하여 고을에 미풍양속을 일으켰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에 의하여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 하여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권구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의 특지(特旨)로 곧 석방되었다.
권구는 경학(經學)·예설(禮說)·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기타 천문·역수(曆數)·역학(易學)·사기(史記) 등에도 매우 조예가 깊어 「경의취정록(經義就正錄)」·「독역쇄의(讀易瑣義)」·「기형주해(璣衡註解)」·「여사휘찬의의(麗史彙纂疑義)」 등을 잡저로 남겼으며, 그 밖에도 옛날 명훈(名訓)을 한글로 번역한 『내정편(內政篇)』이 있다. 저서로는 『병곡집(屛谷集)』 10권 5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