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입암(笠巖).
1708년(숙종 34) 생원시에 합격하고 제용감봉사·상서원직장·사축서별제를 역임하였다. 1714년(숙종 40) 진사로 있을 때 평안도어사 여필희(呂必禧)가 본도(本道)를 순시하고 거짓으로 헐뜯자 사실무근의 뜬소문이라는 것을 입계하였으며, 도내의 모든 관원과 유생들도 여러 번 상소하여 변명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일곱 차례나 상소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내는 강인함을 보였다. 이로써 한 도(道)의 수치를 씻게 하였으므로 사림의 덕이라는 평을 받았다.
1721년(경종 1) 이후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감히 성세에 기미를 알고 떠난다 말하노니, 가을에 바야흐로 노어가 살찔 것만을 생각하지 말라(敢言聖世知機去 勿憶鱸魚秋正肥)."라는 시 1수를 써서 남기고 물러나자 '관서(關西)의 대로(大老)'라고 칭하여졌다. 뒤에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가 되었으며, 동지중추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