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인순부윤,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85년(우왕 11)
사망 연도
1440년(세종 22)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인순부윤|도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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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인순부윤,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김후(金厚)이며, 아버지는 김칠양(金七陽)이며, 어머니는 김용진(金用珍)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17년(태종 17)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참판·좌승지·인순부윤(仁順府尹)에까지 이르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급제하자 임금이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기뻐했다고 한다. 1428년(세종 10) 왕명으로 『서한이하역대보계도(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하고, 종학박사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34년 집현전직제학으로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했으며, 이듬해는 집현전부제학으로 불교의 폐단에 대해 왕에게 상소하고, 그 뒤 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여러 차례 외직을 원하였다.

특히 역마를 보내어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봉양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편, 천문 관측에 정통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도 참여하였다. 한 때 귀양가는 이숙번(李叔蕃)이 순금 띠를 주면서 자신의 구출을 의뢰하자, 여러 방법으로 구출을 모색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종의 명으로 김조(金兆)와 함께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흠경각(欽敬閣)을 창설하고, 종이를 뭉쳐서 일곱자 높이의 산을 만들고 또 그 안에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해 바퀴의 물로 돌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측정되는 해의 도수와 그림자 누수(漏水)의 시각이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산의 사방에는 사시(四時)의 경물(景物)과 사람·새·짐승·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절후에 맞추어놓아 백성이 농경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또, 누기(漏器)를 설치해 이름을 ‘보루각’이라 하고 이층으로 만들어 삼신(三神)을 그 위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시간을 알릴 때는 종을, 경(更)을 알릴 때는 북을, 점(點)을 알릴 때는 징을 울리도록 만들었다. 승지로 7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논변이 상세하고 분명했으며, 집현전 출신으로 박학다식하였다. 특히 과학 기기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이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대동야승(大東野乘)』
『해동잡록(海東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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