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지변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조량(朝良)의 뒤를 이어, 755년(경덕왕 14) 7월 이찬(伊飡)의 관등으로서 시중(侍中)이 되었다. 시중으로 재임하면서 경덕왕의 왕권과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중 757년 3월에는 내외관료의 월봉을 없애는 대신 녹읍을 부활하였다. 한편, 8월에는 호구와 조세를 관장하는 부서인 조부(調府)의 관리 2인을 증원하여, 지방조직의 정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주·군·현의 전통적인 명칭이 중국식의 한자 이름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경덕왕의 한화정책(漢化政策) 추진에 주도적인 구실을 담당하였으나, 그가 죽은 이듬해인 759년 신라의 고유한 관부명을 중국의 방식으로 변경시킴에 따라 경덕왕의 한화정책은 일단락되었다.
당시 경덕왕이 귀족세력의 반발을 받아 한화정책을 통하여 전제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할 때 크게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