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년(혜공왕 15) 대일본하정사(對日本賀正使)가 되어 사절을 이끌고 그해 10월 북구주(北九州)의 태재부(太宰府)에 상륙하여 절차를 마친 다음, 수도인 평성경(平城京)에 도착하였다.
다음해 정월 3일에 국가적인 의식을 행하는 장소인 태극전(大極殿)에서 일본왕에게 하례를 하고 신라국왕의 표문(表文)을 구두로 대신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신라와 일본은 예로부터 서로 내왕하는 사이였으나, 근래 나라 안에 도둑떼들의 침입이 있어 자주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살찬(薩飡) 김난손과 급찬(級飡) 김암(金巖) 등을 보내어 예물을 드리고 하정(賀正)하는 바이다. 또, 귀국의 견당판관(遣唐判官)인 우미카미(海上三狩) 등을 찾아서 신라사신을 따라 환송(還送)하고, 상례에 따라 학어생(學語生)을 보내는 바이다.”라는 것이었는데, 일본측에서는 표문이 없는 것을 아쉬워 하였다.
3일 뒤인 6일에 그는 일본조정으로부터 정5품상(正五品上)을 받았다. 부사(副使)인 급찬 김암은 정5품하를, 대판관(大判官)인 한나마(韓奈麻) 설중업(薩仲業)과 소판관인 나마(奈麻) 김정락(金貞樂), 대통사(大通事)인 한나마 김소충(金蘇忠) 등 3인은 각각 종5품하를 제수받았다.
그밖에 6품 이하도 각기 차등있게 제수받았다. 또한, 그해 2월 15일 귀국하려고 하자 일본측에서 답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앞으로 양국이 서로 표문을 가지고 사신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779년에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은 고대 한일교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