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인현(仁峴)공립보통학교를 졸업, 양주남(梁柱南)·유장산(柳長山) 등의 영화인들이 배출된 혜화(惠化)공립보통학교 부설 상급실습학교 2년을 수료했다. 1921년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도아[東亞]키네마에 입사하여 조명기술을 배웠고, 신흥키네마와 다카다[高田]프로덕션 등에서 조명기사로 지냈다. 1932년 귀국한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조명기사로, 1935년 방한준(方漢駿) 감독의 「살수차(撒水車)」의 조명·제작·출연을 맡았다. 이때 80kW의 텅스텐 전기조명을 최초로 사용했고, 이후 조명분야의 선두주자로서 1939년 박기채(朴基采) 감독의 「무정」및 이규환(李圭煥) 감독의 「새출발」, 1940년 김유영(金幽影) 감독의 「수선화」 등에서 조명을 담당했다.
1942년 조선영화주식회사 조명부장과 기술부 책임자가 되었고, 같은해 조선인의 일본군 입대를 홍보하는 「나는 간다」(감독 박기채)에서 조명을 맡았다. 이외에도 1943년 지원병 모집 홍보를 위한 「조선해협」(감독 박기채) 및 이마이 타다시[今井正] 감독의 「망루의 결사대[望樓の決死隊]」, 1944년 시골 국민학교 교사가 '내선일체'를 잘 선전하여 제자들을 지원병으로 참전케하는 최인규(崔寅奎)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 등과 같은 다수의 친일 군국영화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1946년 「자유만세」(감독 최인규), 1948년 윤봉춘(尹逢春) 감독의 「유관순」, 1956년 이병일(李炳逸) 감독의 「시집 가는 날」 등의 조명을 담당했다. 특히 한국 사실주의 영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히는 유현목(兪賢穆) 감독의 「오발탄」에서는 조명과 함께 제작도 맡았다. 고해진(高海振) 등 다수의 뛰어난 조명기사들을 양성했고,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영화기술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7년 9월 5일 사망했다.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